돼지고기 인문학〈중〉 요리 변천사 2...칠성시장·분식점 벤치마킹한 '북성로 1500원 세트' 야간통금 풀리며 초대박

  • 이춘호
  • |
  • 입력 2021-04-09   |  발행일 2021-04-09 제34면   |  수정 2021-04-0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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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석쇠 위에서 바싹 구워낸 '마당갈비'의 시그니처 메뉴인 쪽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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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의 불맛과 돼지다릿살의 육질이 절묘하게 융합돼 탄생한 대구만의 연탄석쇠돼지불고기. 가스와 참숯 등 다양한 화력이 존재하지만 아직도 연탄불 만한 게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귀엣말이다.
백종원 덕분에 전국구로 격상된 메뉴가 바로 칠성시장 '연탄불고기(일명 석쇠불고기)'인데 족발골목 초입에 있다. 북성로와 달리 즉석에서 초벌구이로만 고기를 구워낸다. 2015년 8월28일 SBS '3대천왕' 첫회 때 단골식당의 석쇠불고기가 소개돼 대박난다. 1960년대 초 친구 간인 유말선·김분선 할매가 동시에 석쇠불고기를 선보였다. 잘되자 순식간에 10여 군데로 불어났지만 이젠 단골·함남식당 두 곳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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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수와 절묘하게 어울렸던 북성로 연탄석쇠돼지불고기. 초창기엔 식탁 대신 목욕탕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먹었고 둥근 양은 밥상이 테이블 대용이었다.
연탄돼지불고기
60년대 칠성시장서 석쇠불고기 첫선
'심야포차' 북성로, 국수도 팔아 대박
'손님 이송' 택시기사는 할인혜택도
연탄석쇠, 초벌 후 '3분 요리' 최적
이제 포차 사라지고 건물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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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처음으로 돼지국밥과 수육시대를 연 중구 서성로 돼지골목 전경. 현재 밀양·8번·이모식당 세 군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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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역전 연탄돼지불고기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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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북성로 돼지불고기 포장마차촌의 모습. 시대의 요청에 따라 지금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연탄돼지불고기

3대 연탄돼지불고기 골목이 있다. '칠성시장·대구역전·북성로'다. 대구역전 대구극장 옆골목은 한때 북성로와 자웅관계였던 연탄불고기 명소다. 얼추 60대라야 그 골목에 대한 추억을 피워물 수 있다. 현재도 5군데가 있는데 대표격은 50년 역사를 이어온 '국일불갈비'다. 윤수상에서 그 아들 윤건식으로 가업이 이어졌다.

북성로 돼지불고기는 칠성시장보다 뒤에 붐을 일으킨다. 그건 가락국수와 절묘하게 어울렸다. 공구가게가 다음 날 아침까지 문을 닫는 심야를 이용해 반짝 영업을 하기 때문에 숱한 추억담을 피워낸다.

옛 전매청 네거리에서 옛 금호호텔 네거리로 가는 서성로에는 서쪽으로 빠지는 골목이 4개가 있었다. 세 번째 골목이 바로 북성로 돼지불고기의 탄생지. 정모씨로 알려진 한 포장마차 주인이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근처에서 돼지불고기를 '가락국수'와 함께 팔았다. 이게 대구명물인 북성로불고기의 시작이었다. 이 메뉴는 다양한 음식문화가 복합적으로 섞여 탄생하게 된다. 불고기는 칠성시장 석쇠불고기, 가락국수는 당시 대박을 터뜨렸던 동성로 미성당 등 여러 분식점의 인기메뉴였던 가락국수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정씨는 불과 1년을 못 넘기고 박정만씨에게 배턴을 넘긴다. 박씨도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주차장 자리에서 '대구은행 앞 돼지불고기'란 상호로 장사를 했다. 박씨 역시 비명횡사. 아무튼 그 무렵 6곳이 더 생겨난다. 한때 거기 터줏대감이었던 최진수 사장도 2007년 뇌출혈로 타계한다. 초창기 개국공신의 말로는 다들 우울했다.

북성로의 명물은 의자. 사람이 몰리면 막 던져도 상처나지 않는 둥근 양은 밥상을 바닥에 깔아놓았다. 우스꽝스럽게도 1인용 낚시 의자 혹은 목욕탕 의자를 내놓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불고기와 우동을 합쳐 1천500원. 심야 택시기사는 손님을 몰아준다는 공로(?)가 인정돼 할인받기도 했다.

왜 하필이면 연탄불이었을까? 숯불은 갈무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음식을 빨리 내기 위해선 연탄석쇠가 제격. 주문하면 3분도 안 돼 고기가 나온다. 초창기에는 지금처럼 다릿살(후지) 대신 갈비를 사용했다.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풀리면서 심야 손님이 폭증했다. 북성로 돼지불고기는 이후 도심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한창 때는 리더격인 준호집을 비롯해 북성로일번지, 부산갈매기, 달맞이, 불타는청춘, 디웅박, 신라의달밤, 태능집, 장작불, 오뚜기, 좋은날, 북성로포장마차 등 모두 13곳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준호집, 태능집, 코끼리집, 친구집, 불타는 청춘, 달맞이집, 장군집, 고향집 등만 남았다. 이제 포장마차촌은 길바닥에서 점포 안으로 들어갔다. 인근이 재개발되면서 포차들도 다른 소상공인처럼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면서 위생적으로 영업해야 된다는 시대의 요청이었다.

북성로와 칠성시장의 맛은 좀 다르다. 북성로는 초벌구이를 해뒀다가 주문 즉시 재벌구이해서 내보낸다. 초창기엔 갈비였는데 나중엔 뒷다릿살로 바뀐다. 젊은 단골은 기름기 없는 걸 선호했고 더 빨리 구울 수 있어 그렇게 됐다. 미리 초벌한 탓에 북성로 고기 맛은 상대적으로 퍽퍽하다. 칠성시장은 다릿살 이외에도 목살, 삼겹살, 갈비 등 여러 부위를 사용한다. 석쇠에서 딱 한 번만에 구워내기 때문에 북성로보다 더 졸깃하다. 맛은 칠성시장, 분위기는 물론 북성로가 한 수 위. 북성로는 가락국수가 축을 이루지만 칠성시장은 없다.

마당갈비
할 수 없이 떠안은 식당 '오픈 대박'
한약차에서 영감받아 만든 양념갈비
석쇠 올려 연탄불에 바싹 구워 별미
매콤한 양념에 졸여먹는 갈비찜도

◆돼지찜갈비 원조 마당갈비

소설가 김원일이 6·25전쟁 시기 머물렀던 집이 계산동 매일신문 바로 옆 골목에 있다. 거기는 '마당깊은집'으로 불린다. 그의 대표 소설인 '마당깊은집'의 배경지다. 바로 근처에 딱 구색이 맞는 식당이 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마당갈비'다. 권영국·김순필씨 부부가 1980년 3월1일 전 재산을 다 날리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차린 식당이다. 이전에는 달성네거리 근처 옛 달성파출소 바로 옆에 자리 했다. 기존 양념 돼지갈비집을 인수했다. 당시만 해도 수육과 국밥이 대세. 삼겹살은커녕 양념돼지고기도 인기가 없었다. 부부는 채권을 행사하기 위해 그 식당을 떠안는다. 기존 사장한테 레시피를 배워 오픈했는데 당일 대박이 나버렸다. 하루 벌어 간판 달고 또 하루 벌어 주방기기를 늘려 나갔다. 남편은 갈비를 장만하고 아내는 연탄불 앞에서 주문받은 양념갈비를 석쇠에 올려 구워냈다. 지금도 그대로다.

마당 양념은 김순필의 작품. 요리교본대로 요리한 게 아니라 시행착오의 산물. 양념 만들기 1단계는 약물 빚기. 감초, 오가피, 산수유 등 4종류 한약재를 넣고 끓인다. 준비된 약수(藥水)에 마늘, 생강, 설탕, 참기름, 캐러멜을 넣고 만든 양념수에 생갈비를 재운다. 방금 갖고 들어온 생갈비는 숙성되고 양념수에 재어져 도축된 뒤 약 4일 만에 식탁에 오른다. 개업 초기 요리가 뭔지 잘 몰랐던 김씨. 남 말만 듣고 육질을 무르게 만드는 연육수도 넣어보고, 물 대신 콜라·사이다는 물론 계피·새우까지 넣었지만 맛은 별로였다. 우연히 맞본 한약차 맛에서 힌트를 얻는다. 절정의 맛을 추출하는데 얼추 10년이 걸렸다. 세상도 달라졌고 세상 입맛도 달라졌다. 갈수록 단맛과 감칠맛을 선호했다. 그걸 조금 반영했다.

10대의 갈비에서 40개 정도의 '쪽갈비'를 잘라낸다. 쪽갈비는 삼겹살이 묻어 있어 '뼈삼겹살'로도 불린다. 하루 숙성하고 특제 소스 넣어 3일 정도 묵혀 굽는다.

갈비구이와 함께 핫 메뉴는 단연 '돼지찜갈비'. 이건 동인동 찜갈비를 응용해 만든 것이다. 돼지갈비로 찜을 만든 것. 2019년 8월 현재 자리로 이사를 왔다. 7년 전 아들 권봉춘(42)이 가업을 이어받았다. 김순필은 26년 구력의 마라톤광, 주1회 하프 구간을 주파한다. 지금도 주방과 마라톤을 병행 중이다.

양념돼지갈비
고추장 양념 돼지불고기 '팔군식당'
돼지갈비 칼집 낸 후 한방양념 '미정'
갈비공장 만들어 체인 사업 뛰어들어
'미정' 주방장 김태근, 기술 특허출원

◆양념돼지갈비의 개척자들

대구에선 암퇘지 자궁(암뽕)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암뽕은 1970년대 선풍을 일으킨 국세청(현 대구 밀리오레) 옆 칼국수 업소의 인기짱 안주였다. 그 뒤편에 자리잡은 팔군식당의 정모 사장은 기존 삼겹살보다 반 발 앞선 요리를 개발한다. 돼지 다릿살에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버무린, 제육볶음·고추장돼지두루치기 같은 '돼지불고기' 시대를 주도한다. 이 스타일 역시 동인동 찜갈비를 응용한 것. 팔군식당은 단번에 스타급으로 부상하면서 대구백화점 근처에 2호점을 내면서 돼지불고기계의 좌장이 된다.

이런 배경을 안고 양념돼지갈비가 198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그 주역 중 한 곳이 바로 남부정류장 근처의 '미정(사장 우영조)'이었다. 돼지갈비 붐은 프로야구 출범과 상관관계가 있었다.

미정은 돼지갈비를 칼로 저며 길게 펴낸 뒤 소갈비처럼 둘둘 말아냈다. 손님들은 그걸 '소갈비'로 오해한다. 당시 돼지갈비를 소갈비말이식으로 갈무리하는 데는 없었다. 특히 미정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방 재료를 기용한다. 계피와 감초·생강을 왜간장에 섞어 끓여 만들었다. 그 아이디어 역시 거기 주방장이었던 김태근한테서 나왔다. 한약재 노하우를 전수해준 건 약전골목 대방약업사 강희수 사장. 그는 시간만 나면 강 사장을 붙들고 돼지와 소와 궁합이 맞는 한약재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쳤다.

미정은 1989년쯤 100m 동쪽으로 이전한다. 1층 테이블 수만 53개. 2층은 2군사령부, 경산 코오롱, 한일합섬, 조폐공사 직원들의 회식장으로 변한다. 영남대 졸업식 때는 오전 10시~밤 10시까지 풀가동돼 홀 종업원들이 실신하기도 했다. 미정은 대구 숯불갈비집으로선 처음으로 '미정식품'이란 갈비공장을 만촌3동 영남공고 앞에 설립한다. 숯불갈비 체인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김태근은 1997년 독립해 대봉동에서 대구 첫 한방돼지갈비 전문점을 오픈하고 그 기술을 특허출원한다. 현재 본점은 크리스탈호텔 근처에 있다. 이후 호박터 등 다양한 저가 돼지갈비점이 우후죽순 생겨난다. 하지만 이들은 메이저급이 되기는 역부족이었다. 미정이 키워낸 그 맛의 전통은 마침내 '행복한갈비' '전원숯불' 등으로 이어진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 대구 양념돼지갈비 전문점
7김태근한방돼지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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