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1] 중국 화산 창룡령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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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03 08:01  |  수정 2021-05-03 08:02  |  발행일 2021-05-03 제20면
산등성이 칼날같고 양쪽은 절벽…쉽게 못 넘는 '기험천하제일산'
화산 창룡령
아래에서 바라본 화산 창룡령. 한유가 무서워서 방성대곡하며 구해줄 것을 요청하는 글을 써서 던진 곳으로 유명하다.
그동안 취재 목적이나 개인적으로 여행하며 지구촌 곳곳을 돌아봤다. 중국·이탈리아와 스위스·독일·미국·일본·태국·몽골 등의 경우는 여러 곳을 여행했다. 파리·런던·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는 각 도시에서 사나흘 또는 1주일 정도 머무르기도 했다. 곳곳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자연 풍광, 흥미로운 문화유산, 다채로운 주민들의 삶은 기존의 시각과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며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지난 여행 사진들을 보면서 소개·공유할 만한 내용이나 생각들이 떠오르는 곳을 다시 더듬으며 추억 산책을 시작한다. 먼저 중국 화산으로 떠나본다.

화산(華山)은 중국 산시(陝西)성에 있는 산. 중국 5대 명산인 '오악(五嶽)' 중 하나다. 오악은 중악 숭산(嵩山), 동악 태산(泰山), 서악 화산(華山), 남악 형산(衡山), 북악 항산(恒山). 가장 높은 남봉이 해발 2천155m에 달하는 화산은 수려하기도 하지만 특히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오악 중 가장 높고 험준한 산으로 '기험천하제일산(奇險天下第一山)'이라 불린다.

화산은 거대한 봉우리와 기암괴석이 즐비하지만, 산 전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하나로 구성된 바위산이다. 화산이란 이름도 평지 위에 우뚝 솟은 화강암 바위산이 맑은 날에 빛을 받으면 빛이 나기 때문에 또는 다섯 산봉우리들이 꽃송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산 밑에서부터 최고봉인 남봉 정상까지 바위를 쪼아 계단을 만들거나 구멍을 파고 쇠줄을 박아서 만든 등산로가 이리저리 이어져 있다. 1996년과 2003년에는 석굴을 뚫어 설치한 케이블카를 개통, 북봉과 서봉 근처까지 쉽게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케이블카를 이용하더라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그래서 포기하는 사람이 더 많은 위험천만한 길을 다시 오르내리지 않으면 화산의 절경을 제대로 누릴 수 없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위의 좁고 가파른 길을 통과해야 하니 한자·한글·영어·일어로 함께 써놓은 '걸을 때 풍경을 보지 말고, 풍경을 구경할 때 걷지 마세요(走路不看景 看景不走路)'라는 안내판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심장이 멎을 것 같지만 눈길을 들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절경들이 수두룩하다.

中 5대 명산 중의 하나…해발 2155m
산 전체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구성
등산로·케이블카 있어도 등산 힘든곳
걸을때 풍경에 한눈팔면 위험 경고도

당송팔대가 '한유'가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기 무서워 방성대곡한 일화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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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퇴지가 구출 요청서를 써서 던진 곳

화산의 다섯 봉우리(동·서·남·북·중봉)를 연결하는 주요 등산로 중 가장 가파르고 무서운 길이 창룡령(蒼龍嶺)을 오르내리는 길이다. 안내판에 '산등성이는 칼날 같고 그 양쪽은 끝없는 절벽(嶺脊如刃 兩側空絶)'이라는 문구가 있다. 딱 그대로다.

북봉에서 중봉·동봉 등으로 가는 길에 있는 창룡령은 검푸른 용의 기세를 하고 있는 듯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폭 1m 정도의 530여 개 돌계단 길로 되어 있다. 경사도가 40도 정도로 심하고, 양쪽 모두 엄청난 수직 낭떠러지여서 기어서 오르내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내려가는 방향은 금쇄관(金鎖關)이라는 곳에서 시작된다. 금쇄관은 이 관문을 지나야 중봉·동봉·남봉·서봉으로 가는 길로 통하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여기를 닫아버리면 화산을 오를 길이 없기 때문에 '금쇄관'이라 한다.

이 창룡령에는 유명한 '한퇴지투서처(韓退之投書處)' 일화가 서려 있다.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인, 중국의 대표적 문인 한유(韓愈·768~824)가 그 주인공이다. 퇴지(退之)는 그의 자다.

한유의 조카로 도교 수련자인 한상자(韓湘子)가 있었다. 그는 여동빈(呂洞賓)·하선고(何仙姑) 등과 함께 도교 팔선(八仙)에 속한다. 하루는 한유가 한상자·여동빈과 이야기를 나누다 두 사람의 권유로 화산에 오르게 된다. 화산은 예로부터 도교의 성지로 꼽힌다.

한유는 지필묵을 지참하고 두 사람과 함께 화산 등산에 나섰다. 정상(남봉)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떠나갔다. 한유는 사방을 둘러보며 더없는 절경을 즐겼다. 천천히 산을 거닐며 진악궁(鎭岳宮)·옥정루(玉井樓) 등도 관람했다. 또한 산봉우리가 연꽃 같다는 연화봉(서봉) 등을 바라보며 선경에 취해 시흥이 일자 시도 한 수 읊었다.

그리고 남천문(南天門)을 지나 장공잔도(長空棧道)를 바라보니 신선이 아니고서 어찌 이 험한 길을 지나갈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탄하며 돌아 나와 동봉을 둘러보고는 금쇄관으로 내려갔다. 마음속으로 하산은 산을 오르는 것보다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룡령 정상에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절망감이 몰려왔다. 급경사의 능선 마루는 칼날과 같았고, 좌우의 수직 낭떠러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계단과 양쪽에 잡을 난간이 있는 지금도 기다시피하며 오르내리는 사람이 많은데, 계단조차 없었을 당시는 오죽했겠는가. 두려움에 무너진 그는 '여기서 죽고 마는구나' 생각하며 방성대곡을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이를 꺼내 유서와 구출을 요청하는 글을 써서 절벽 아래로 던졌다. 마침 약초 캐는 사람이 있어 이를 발견, 화음현령(華陰縣令)에게 보고했다. 현령은 바로 한유를 구하러 사람들을 산으로 보냈다. 창룡령에 오른 사람들은 한유가 너무나 두려움에 떨며 움직이지 못하자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데리고 내려왔다 한다.

후세인들은 이 일을 기념해 '한퇴지투서처' 여섯 자를 창룡령 꼭대기 근처 암벽에 새겼다. 나중에 산시(山西) 지방에 사는 100세의 조문비(趙文備)란 노인이 '한퇴지투서처'에 와서 한유의 일을 알고는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그 후 청나라 때 이백(李柏)이라는 사람은 이곳에 올라 또 다른 심정으로 이렇게 읊었다.

'화산이 위험천만한 것은 창룡령 때문인데(華之險嶺爲要)/ 한유는 울었고 조 노인은 조소했다네(韓老哭趙老笑)/ 그 괴로움과 비웃음은 두 가지 묘한 일로 전해졌지만(一苦一笑傳二妙)/ 나 이백은 조소하지도 울지도 않고(李柏不笑也不哭)/ 혼자 고개에 서서 길게 휘파람을 부네(獨立嶺上但長嘯).'

창룡령은 말이 없지만 오르는 사람들이 도토리 키재기하듯 자신의 간 크기를 자랑하며 화젯거리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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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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