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대구건축문화기행 '브릭(Brick)로드'를 가다…100여년 전 격동의 시대 서양건축물 대구 도심서 만난다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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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05   |  발행일 2021-11-05 제13면   |  수정 2021-11-05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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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건축문화기행 브릭로드의 백미인 대구 중구 남산동 성모당. 드망즈 주교가 건축한 것으로 1918년 완공되었다.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 동굴을 본 따 화강석 기초위에 아름다운 아치를 올린 것이 특징이다.

오래된 도시를 구성하는 건축물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공학적인 다양성과 인문학적인 다양성뿐만 아니라 나아가 시대에 따른 의미와 기능 또한 유동적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간을 가진 건물들의 병치는 역사의 연속성 위에서 유기적 연대를 이루면서 보존된 것의 가치를 신뢰케 한다.

대구는 오래된 도시다. 대구시와 대구관광재단은 대구의 다양한 건축물을 통해 도시의 내면을 찾고 오늘의 나를 투영하는 건축문화기행 '나를 짓다'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코스가 종로의 화교협회부터 계산성당, 선교사주택, 계성중학교, 성유스티노신학교, 성모당으로 이어지는, 1900년대 격동의 시대에 우리에게 온 붉은 벽돌집을 찾아 걸어보는 '브릭로드'다.

화교협회~선교사 주택~성모당 코스
역사성 있는 다양한 건축물 잘 보존
아담스관, 영남 첫 서양식 학교 건물
성유스티노신학교 김수환 추기경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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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건축문화기행 브릭(Brick)로드의 첫 코스인 대구화교협회. <영남일보 DB>

◆서양건축과 대구의 만남

종로는 또 10년 전과 다르다. 가구상과 다기점, 골동품과 앤티크 상점들이 가득했던 거리였지만 지금은 온갖 종류의 식당과 카페들이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종로의 고샅길인 진골목의 정취는 여전하다. 진골목은 근대초기 대구 토착세력이었던 달성서씨들이 모여 살던 부자 동네였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도 진골목에 살았다. 그들이 살던 대저택은 지금 식당이 되었지만 골목 양옆으로 세워진 붉은 벽돌담은 100여 년 전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에 대구화교협회가 있다. 1929년에 지어진 2층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이다. 건물 모서리와 창호의 상하인방에는 하얀 화강석을 둘렀고 돌출된 현관은 반원형 아치로 장식해 상당히 화려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원래 대구의 거부 서병국의 저택으로 중국인 건축기술자 모문금이 설계와 시공을 맡았다. 벽돌은 평양에서 구워오고 나무는 금강산에서 베어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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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은 고딕 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우리나라에 조적식 근대 건축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이후다. 19세기 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다.

특히 1886년 프랑스는 정식으로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가톨릭 선교의 자유를 얻었다. 이때 조선으로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을 위해 성당과 사제관 등을 지었는데, 대개 고딕 및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적식 건축물이었다. 설계는 대부분 프랑스 신부들이 맡았고 청나라의 벽돌공, 미장이, 목수 등이 시공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에 화교가 이주한 것은 1905년부터로 추정된다. 우선 1904년 경부철도가 완성되면서 화교 상인들이 많이 들어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선교의 확산으로 관련 건축물을 짓기 위해 화교 건설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그들은 종로에서 포목업, 건축업, 요식업 등을 하며 경제적으로 정착했다. 모문금과 그의 스승 강의관은 쌍흥호라는 건축청부회사를 설립해 활동하며 대구 '브릭로드' 곳곳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역사의 부침에 따라 대구의 화교들은 점차 사라져갔지만 그들의 물리적 정신적 중심인 협회건물은 여전히 현재한다.

◆브릭로드를 따라

남성로 약전골목을 통과해 계산성당으로 간다. 남성로는 대구읍성의 남쪽 성벽이 있던 곳이다. 대구읍성은 1907년 무너졌다. 대구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 등에 의한 불법 철거였다. 계산성당의 둥근 장미창이 쨍한 가을 햇살을 받아 짙은 회색빛을 띤다.

계산성당은 원래 1899년에 한옥으로 지어졌다가 1901년 전소되었다고 한다. 재건은 곧바로 시작되어 1902년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세워졌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가 설계를 하고 서울 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했다. 그때만 해도 대구읍성은 건재했고 계산성당은 성 밖의 백성들 속에 자리했다. 부드러운 초가지붕 아래 살던 사람들은 이 집을 뾰족집이라 불렀다. 1911년에는 종탑을 높이는 등 증축을 했고 1918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계산성당의 뾰족한 첨탑은 100년이 넘도록 그대로다. 주변에는 뾰족집보다 더 높은 건물들도 생겼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오래된 좁은 골목길과 낮은 지붕들과 마당 깊은 집이 있다.

계산성당 앞에서 서성로를 건너 3·1운동계단을 오르면 동산이다. 달성토성의 동쪽에 있어 '동산'이라고 불린 작은 언덕이다. 동산마루에 3채의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 아름다운 정원에 둘러싸여 있다. 20세기를 전후해 조선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왔던 미국인 선교사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의 집이다. 1910년경 건축된 이들 주택에는 허물어진 대구읍성의 성곽돌 일부가 주춧돌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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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1910년경 지어진 것으로 당시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유행하던 방갈로 풍이다.

블레어 주택은 콘크리트 기초에 붉은 벽돌을 미식쌓기 한 2층 양옥이다. 챔니스 주택은 박공지붕의 붉은 벽돌 건물과 평지붕의 목조 건물이 어우러진 형태로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 풍이다. 스윗즈 주택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있는 붉은 벽돌 건물에 기와지붕이 올라 있다. 대구의 여름은 그때도 대단했던지 선교사들은 집집마다 더위를 식혀주는 담쟁이덩굴을 심어 올렸다. 그렇게 동산은 '푸른 담쟁이의 언덕'인 '청라언덕'이 되었다. 청라언덕에 살던 선교사와 가족 14명은 챔니스 주택 아래 은혜정원에 잠들어 있고 그들의 집은 교육역사박물관, 의료박물관, 선교박물관이 되어 우리와 함께 숨 쉬었던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동산을 내려와 달성로를 건너면 길가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서문시장의 난전들 저 너머로 계성중학교가 고요하게 서 있다. 단풍 그늘에 반짝이는 계단을 올라 정면으로 마주하는 붉은 벽돌 건물은 본관인 핸더슨관이다. 블레어 선교사가 모금을 하고 핸더슨 교장이 설계와 감독을 맡아 1931년에 지어졌다. 기초공사는 학생들이 맡았고 중국인 벽돌공과 일본인 목수들이 건물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여장을 가진 쌍탑과 옥상의 흉벽이 서양 중세의 성곽을 떠올리게 한다. 세로로 긴 창의 고딕적 요소와 층간 수평 돌림띠의 르네상스적 요소도 절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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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스티노신학교는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 주교가 사제 양성을 위해 1914년 건립했다.

핸더슨관 좌측에는 아담스관이 위치한다. 선교사 아담스는 1906년 초가에 계성학교를 열었고 1908년 이 건물을 지었다. 영남 최초의 서양식 학교 건물이다. 기초와 지하실에 대구읍성의 성돌이 쓰였다. 그리고 이곳 지하에서 1919년 3·1 만세운동을 위한 태극기가 제작되었다. 핸더슨관 우측에는 맥퍼슨관이 자리한다. 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1913년에 지은 것으로 2층의 붉은 벽돌 건물에 한식기와를 올린 모임지붕이다. 당시에는 과학실·음악실 등으로 사용됐고 이곳에서 한국 현대음악의 선구자인 박태준과 현제명이 함께 공부했다.

달구벌대로를 건너 남산동의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면 붉은 벽돌의 축담이 길게 길을 인도한다. 이곳은 구한말의 지역 천주교 문화가 밀집된 공간이다. 1911년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해 온 드망즈 주교는 루르드의 성모마리아를 제1주보성인으로 선포하고 성모에게 3가지를 청원했다.

'주교관과 신학교를 건설하고 주교좌성당을 증축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소원이 이루어지면 대지 안의 가장 좋은 장소에 루르드의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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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영남 최초의 서양식 교사로 지어진 아담스관. 이곳 지하에서 3·1만세운동을 위한 태극기가 제작되었다.

1913년 주교관이 세워졌고 1914년 성유스티노신학교가 세워졌다. 대지는 서상돈이 기증했고,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성유스티노신학교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이 있다. 이곳에서 공부한 많은 학생들이 이후 한국 가톨릭의 중추적 세력이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도 이곳에서 공부한 뒤 계산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현재 성유스티노신학교 건물은 개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세 번째 청원은 1918년에 이루었는데 바로 계산성당의 완성이다. 그해 드망즈 주교는 청원의 약속대로 교구청 내 가장 높고 아름다운 장소에 성모당을 지었다. 벽돌의 정교한 짜임과 아치의 아름다운 비례구성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벅찬 장엄을 선사한다. 벽돌은 2천℃에 가까운 불길을 견딘 후에야 혹독한 환경에 맞설 수 있다. 오늘도 성모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대구건축문화기행 '나를 짓다' 캠페인…내달 12일까지 다양한 체험행사

대구시와 대구관광재단은 대구건축문화기행 '나를 짓다' 캠페인을 내달 12일까지 운영한다. 코스는 총 4개다. 첫 번째가 '브릭로드'이고, 두 번째는 대구문학관에서 대구삼성창조캠퍼스까지 도시재생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건축물들을 돌아보는 '대구 르네상스'코스다. 세 번째는 대구의 고건축을 돌아보는 '천년대구'코스로 동구코스와 달성군 코스로 나뉘어 있다. 또한 캠페인 동안 모바일 앱 '워크온'을 활용한 대구 건축자원 길 따라 걷기 챌린지, 대구 건축문화기행 온라인 이벤트, 유현준 건축가와 함께하는 대구 건축문화기행 랜선 라이브 투어, 온라인 여행사를 통한 디아크 피크닉 체험, 연필 든 여행자 클럽, 대구 런 여행자 클럽 등 다양한 행사와 체험을 진행한다. 자세한 내용은 대구건축문화기행 홈페이지(https://대구건축문화기행.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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