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북 청도 와인터널…황금빛 감와인 익는 터널서 새해 소원지 적어볼까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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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07   |  발행일 2022-01-07 제13면   |  수정 2022-01-07 07:40
1904년 완공된 옛 남성현 철도터널
선로 이설후 60년대까지 국도 역할
온도 13~15℃ 유지 와인 숙성 최적
2003년부터 빈티지별로 3만병 보관
와인 판매장·카페·조형물 등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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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터널은 연간 100만명의 내외국인이 방문하고 있는 청도의 대표 관광자원이다. 터널 안에는 방문객이 정성스럽게 적은 소원 쪽지가 겹겹으로 달려있고, 천장에는 터널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황금박쥐 조형물이 매달려 있다.

자갈궤도가 터널을 향해 뻗어 누웠다. 열린 문 속으로 보이는 터널 안은 밤처럼 깜깜하고, 몇 개의 불빛은 별처럼 떠있다. 터널 입구의 아치 위에는 커다란 주홍빛 감이 매달려 있고 그 뒤로 '대천성공(代天成功) 명치(明治) 37년(年)'이라 새겨진 판석이 보인다. 메이지 일왕 재위 시기인 1904년에 건설되었다는 의미다. 글씨는 당시 일본군 육군 중장이면서 3대 조선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썼다고 한다. 입구의 레일 옆에 '복리천추(福利千秋)'라 새겨진 방형의 큰 화강석이 반듯하게 놓여 있다. 낙관이 훼손돼 언제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뜻만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복과 이로움이 천년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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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터널 내에서는 다양한 청도 감와인을 맛볼 수 있으며 케이크와 치즈 등도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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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와인 스트리트'에 들어서면 금빛의 청도 감 와인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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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와인터널 입구. 1905년 개통된 옛 경부선 철도 터널로 2006년 들어 감와인의 숙성과 저장, 그리고 관광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기차 터널에서 와인이 익어가는 터널로

터널 안으로 들어선다. 훅, 곰팡이 냄새가 설핏 난다. 아니, 이끼의 향인가. 바람은 없고, 바닥은 깊은 방공호처럼 침착하다. 높은 궁륭의 천장이 끝없이 멀어지고 깊이 파고드는 빛들의 바림이 아스라하다. 커다란 와인 병이 살짝 기울어진 듯 서 있고 큼지막한 오크통들이 피라미드로 쌓여 있다. 이곳은 1896년 일제가 착공해 1904년 완공한 옛 남성현 철도터널이다. 경부선의 터널 중 제일 먼저 개통되었고 1905년부터 증기기관차를 운행했다. 터널은 산중턱에 위치해 있어 당시 기관차 2량이 앞뒤에서 끌고 밀면서 힘겹게 통과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1937년 선로가 이설되었고 새로운 남성현 터널이 개통되었다.

옛 터널에 더 이상 기차는 달리지 않았지만 1960년대 말까지 버스 등이 통과하는 국도의 기능을 담당했다. 6·25전쟁 때는 아군의 각종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지금도 터널 주변에는 옛날 공사용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임시로 부설한 선로의 흔적과 급경사를 극복하기 위한 스위치백 선로 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

터널의 길이는 1천15m, 폭은 4.5m, 높이는 5.3m다. 천장의 아치를 만든 것은 오래되고 검붉은 벽돌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시베리아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치는 3겹으로 정교하게 조적돼 있어 반영구적으로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판정받았다고 한다.

붉은 벽돌 위로 푸른 이끼들이 얼룩처럼 퍼져 있다. 검은 그을음은 옛 증기기관차의 흔적이다. 기온은 무표정하고 이따금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소스라친다. 터널 내부는 사계절 내내 13~15℃의 온도와 60~70%의 습도가 유지된다. 진동도 소음도 없는 이 어둠 속에서 지금 와인이 익어간다.

청도 와인은 감 와인이다. 씨가 없는 청도 반시로 만든다. 5년간의 연구 개발을 거쳐 2003년 탄생했다. 세계 최초다. 주정을 전혀 첨가하지 않고 감 100%를 특수 효모로 발효시켰다. 감은 떫은맛을 내는 탄닌 성분이 포도보다 많아 더 깊은 맛을 낸다고 한다. 감와인은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 만찬주로 사용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6년 3월부터는 5년간 100억원의 미국 수출을 계약했다. 그리고 그해 와인터널을 오픈했다. 터널은 와인을 숙성하고 저장하는 공간이며 와인을 즐기는 카페이자 전시나 버스킹 등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지는 공간이 되었다.

◆와인의 수면 속을 조용히 걷다

음악 소리가 들린다. 궁륭과 이끼와 물기에 반사된 피아노 소리가 부드럽게 몸을 감싼다. 와인 판매장에는 사람이 없다. 레귤러, 스페셜, 아이스, 아트 등 진열된 상품들을 쓸쓸하게 구경한다. 와인 바에는 한 청년이 와인을 따르고 있다. 황금빛의 감 와인이 투명한 잔 속에 떨어지는 모습을 한 여인이 바라본다. 쪼르륵. 와인바 옆으로 테이블과 등불이 아름답고 로맨틱하게 늘어서 있다. 사람과 말들과 잔들이 부딪히는 떠들썩한 모습이 그려진다. 사람 없는 테이블의 벽면에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고갱의 '밤의 카페',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과 같은 그림에서 와인 향이 나는 것 같다. 요즘 세계는 너무 가련하다.

쓸쓸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지나면 '빈티지 와인 스트리트'라는 네온이 빛나는 육중한 문이 우뚝 길을 막듯 서있다. 비좁게 열린 문을 통과하면 금빛의 조형물이 나타난다. 잔을 향해 기울어진 병의 형상은 와인 바의 청년이 와인을 따르던 그 모습이다. 그리고 커다란 오크통의 행렬이 이어진다. 각각에는 빈티지와 종류, 용량이 표기되어 있다. 이 오크통 속에서 술이 익어간다.

깊이 들어갈수록 음악소리는 얕아지고 이윽고 형광의 그림들만이 유영하는 아주 까만 공간을 지난다. 단단한 바닥을 걷고 있지만 바닥이 없는 미지를 흐르는 듯하다. 그토록 현란한 고요 너머는 술들의 잠자리다. 높게 쌓여 길게 이어지는 각각의 케이지마다 수백 병의 와인이 먼지를 덮고 누워 있다. 2003년부터 빈티지별로 약 3만병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의 수면 속을 조용히 걷는다. 겨울잠에 든 곰을 깨우지 않으려는 사냥꾼처럼 조심스럽고 약간은 음흉하게.

갑자기 눈앞이 휘황찬란해진다. 천장에는 황금 박쥐가 매달려 있고 주변에는 수만, 수백만 장의 종이가 겹겹으로 달려 있다. '아빠 담배 끊게 해주세요' '엄마 다이어트 성공 파이팅' 등 종이마다 사람들의 소원이 적혀 있다. 건강과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보인다. 누구와 누가 언제 '1일'을 시작했는지, 누구와 누가 사랑을 맹세했는지 알아버렸다. 와인 터널을 개발할 당시 터널 안에는 수많은 박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한 마리가 금빛을 띠고 있었는데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는 터널을 떠났단다. 터널에 남긴 사람들의 무수한 소원은 황금박쥐가 지키고 있다.

이제 터널의 끝이다. 터널 끝에 보름달이 덩실 떠 있다. 육박하듯 무섭게 떠있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 나가다 와인 판매장에 멈춘다. 와인 바의 청년을 불러 아트와인을 한 병 산다. "차게 드세요. 고기와도 잘 어울려요." 빨간 와인박스를 달랑이며 터널의 입구로 향한다. 문 밖 세상이 아주 밝다. 보름달보다 밝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대구 파동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팔조령터널을 지나 샛별교차로에서 좌회전, 연지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청도 프로방스와 용암온천을 지나 갈 수 있다. 시지·경산 쪽에서는 25번 국도를 타고 청도읍 방향으로 가면 되고, 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청도IC에 내려 25번 국도를 타도 된다. 현재 청도 와인터널은 한시적으로 무료 개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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