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칼럼] 무엇에 열광하는가

  •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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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21   |  발행일 2022-01-21 제23면   |  수정 2022-01-21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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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중요한 건 답보다 질문이다. 좋은 질문은 바른 답에 이르게 하는 지혜의 통로, 최적의 방책이다. 마지막 4막을 향해 숨가쁘게 달리는 20대 대선,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차마 뱉지 못하고 목젖에 걸린 가시 같은 의문이 있다. "우리는 무엇에 열광하는가."

막장 선거라 힐난하면서도 불 데인 듯 뜀뛰며 무리 지어 만들어내는 이 광기의 정체는 무엇인가. 물 건너편에 먹이가 있을까 싶어 바다로 마구 뛰어드는 '나그네쥐'에 빗댈 순 없지만, '레밍 효과'의 일단이 엿보임은 어찌할꼬. 막장 후보, 4류 정치 탓만 해선 문제의 본질을 짚지 못한다. "무엇에 열광하는가"는 유권자 우리 자신을 향한 문제 제기다. 자성적 질책이다. 그동안 대중은 자신의 치부를 돌아보는 것에 소홀하고 인색했다.

'김건희 녹취록' 방송이 예고된 며칠 전 "오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밤 8시20분만 기다리겠다"는 사람이 숱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요란했던 소동이 낯 뜨거웠다. 겉으로 평온했던 그날 밤, MBC에 우롱당했다며 흥분한 사람, '김건희'에 분노한 사람, 녹취했다는 기자의 아리송한 정체에 속았다는 사람들로 온라인 세계는 북적였다. 7시간43분짜리 녹취분을 10분짜리로 치환한 가십성 기사에 한 주 내내 대중은 분노하는 중이다. 분노는 또 다른 형태의 열광. 분노를 부추기는 몹쓸 자들, 얼마나 더 추해지려는가. 이들을 꾸짖는 건 무용한 일이다. 거기에 답이 있지도 않다. 거짓은 왜 아름다운 해넘이 노을처럼 가끔 멋지게 보이는 걸까. 거짓 환영에 열광하는 대중. 이제 제발 우리 스스로를 의심해보자.

독두(禿頭)와 멸콩, 무속과 160분 욕설로 들끓는 막장 대선. 어느 후보든 무속의 고리 못 끊으면 지도자 자격 없다. 궤변을 자신 있게 말한다고 대중이 속으면 어떡하나. '이대남'에 맞춘 갈라치기 전략도 불편하다. 정보화의 장엄한 세례를 받았지만, 무한경쟁·승자독식·개인주의의 피해자인 2030세대와 'GGONDAE(꼰대)' 세대 간의 문화 충돌을 악용하는 건 모두에게 유해하다. 젠더 공약에 젠더 철학은 없고 divide & rule(분할지배)의 야비한 속셈만 엿보인다. 타협을 가로막는 데는 편향된 정보만 제공하는 알고리즘과 이에 익숙한 대중이 존재한다. '지르기' 경쟁도 아니고 일자리 300만개, 주택 250만호가 어디 하늘에서 쏟아지는 광야의 메추라기인가. 인기영합주의가 후보의 문제라면 이를 유발하고 즐기는 대중의 책임 또한 작지 않다.

이제 자유와 정의를 외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질문도 없다. 반짝했던 '공정' '약자와의 동행'은 쓰레기통 속에서나 겨우 찾을 수 있다. 그 나물에 그 밥임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더는 떠벌리기 창피했을 거다. '공정'을 용도폐기한 후보. 싸우면서 닮아가는 건가. 이재명의 소확행? 석열씨의 심쿵 약속? 모두 깨알 공약이다. 필요하지만 보조제일 뿐이다. 미래 비전과 국정 철학은 실종되고 자잘한 것만 넘친다. 2017년 적폐 청산, 2012년 경제민주화, 2007년 대운하 같은 소구력 있는 주제가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의식'이라 했던가. 허접한 가십이 본질을 밀어내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이 괴상한 선거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이 봐선 안 될, 절대 배워선 안 될 19금 대선, 누가 리셋할 것인가. 후보? 정당? 대중이다. 대중의 각성. 막장 대선은 이를 환기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변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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