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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변호사 |
좋든 싫든 우리의 행위는 일상적으로 판단 받게 되는데 반드시 재판절차만은 아니다. 그 절차가 민사재판이든 학교폭력심의위이든 사람의 행위를 저울에 달아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려야만 오늘의 분쟁을 종식하고 내일을 맞을 수 있다. 대개 그 절차에서 따라야 할 규범은 양 당사자 중 누가 권력자인지 다수자인지는 전혀 변수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 되는 것은 금지된, 판단자의 '판단'에 개입하려는 자가 늘 있다는 점이고 그는 자신의 행위가 개입이 아닐뿐더러 심지어 정의롭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사와 재판의 실제에 있어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쟁투는 매우 치열하다. 공격하는 자는 '있다'를, 그 상대방은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대낮 동성로 거리에서 사람을 두드려 팬 범죄사실처럼 자명한 경우도 있지만, 두 사람만 있는 곳에서 벌어진 뇌물수수 또는 성범죄처럼 이리 보면 있고 저리 보면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결국 그 간극을 어떻게 메워서 판단할 것인가가 상존하는 어려움인데, 성실한 판단자는 선입견을 배제하고 밤새워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증거법칙에 따라 죄의 있음과 없음을 가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한편 그 간극에서 판단자의 이목을 끌고 심증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노력을 변론이라고 하는데, 정교한 논리의 조합인 법률상 주장과 입증이라지만 어찌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고 내일이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리는 부질없는 것이기도 하다.
법률이 인정한 변론을 떠나 다른 방법으로 판단자의 판단을 이끌어오려는 노력도 판단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어디서든 꾸준히 있다. 판단자와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을 내세워 인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걸 두고 '전관예우'라고 부르는 사자성어가 생긴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법조계가 대표로 욕을 먹지만 판단이 이루어지는 모든 공간에서 '전관'과 '브로커'는 설치고 있다. 근래 공적이 된 LH공사의 전관을 보면 오히려 법조계는 그래도 감시의 대상이라도 되니 그처럼 막 나가진 않는다고 위안 삼을 지경이겠다.
뜯어보면 인정에 호소하는 전관 같은 개입은 담당 법관이 단호하게 대처하면 문제가 되지 않으니 그 패악이 개별적이고 사소하다. 판단자의 판단에 대한 개입이 단순한 의리나 인정의 호소가 아니라 상당한 힘을 가진 경우, 국가의 절대적 권력자라면 어떨까? 상관으로부터 수사결과에 대해 간섭을 받았다는 군사경찰 책임자의 말이 그런 경우이고,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로 위장하고 허위선동과 패륜적 공작을 일삼고 있다는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도 이 땅의 수많은 판단자의 판단에 개입하려는 것이 아닐까. 과연 정의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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