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그단새] '초간일기'를 읽는 겨울

  •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 |
  • 입력 2024-01-16 06:56  |  수정 2024-01-16 06:57  |  발행일 2024-01-16 제23면

2024011501000457500019011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초간정을 추천할 것이다. 초간정은 예천 용문 금곡천이 휘돌아 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선조 때 문인 권문해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일컬어지는 '대동운부군옥'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권문해는 1534년 예천 용문면 죽림리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스물세 살 때부터 퇴계 이황 밑에서 김성일, 류성룡 등과 함께 글을 배웠다. 156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등에서 일을 하다가 1573년 마흔 살에 안동부사가 되었다. 그 이후 청주 목사, 공주 목사, 대구 부사를 거쳐 사간원과 승정원에서 업무를 맡아 일했다.

권문해가 1580년 선조 13년부터 1591년 선조 24년까지 10년 동안 쓴 일기를 모아 묶은 책이 '초간일기'다. 한문에 눈이 어두운 나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나온 국역판을 읽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말라비틀어진 구절초 꽃대에도 하얗게 눈이 쌓이는 겨울, 옛사람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그 마음을 읽는 일은 꽤 설레면서도 삼삼한 데가 있다.

1582년 2월 초간정을 짓기 시작하고 거기에 자주 가서 소일했다는 기록은 매우 생생하게 적혀있다. "정사의 터를 초간 도연의 가에 얻었다. 이웃에 사는 사람 30명을 빌려 술과 음식을 먹이고 터를 메워서 축대를 쌓았다." 봄이 되어 정자의 터를 닦는 일은 2월8일부터 여러 날 지속되었다. 2월12일에도 "용문사의 승려 및 용문동 주민들의 힘을 빌려 정사의 터를 닦았다"고 적었다. 2월19일에는 "초간정사로 가서 소나무 몇 그루를 심게 하였다"고 썼고, 2월24일에는 "초간정 동쪽 가 바위 아래 물이 떨어지는 곳이 있어 연못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물은 어깨가 잠길 만큼 깊었다고 했다. 2월26일에는 괴목(느티나무)을 여러 그루 심었다는 기록도 있다. 정자를 지으면서 원림을 조성하는 데 열성을 다하였다는 것이다. 건축물 주위에 나무를 심어 인공의 건축물이 자연과 어울리도록 배려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초간은 그해 6월에 부인 곽씨의 상을 당했다. 첫째 부인 현풍 곽씨의 장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관혼상제의 질서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잘 보여준다. 6월21일 사망 후 염습부터 시작해서 10월13일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과정을 빠짐없이 적어 놓았다. 입관, 빈소 차림, 상복 짓기, 가묘 만들기, 제사, 나무를 베어 판을 떠서 관을 만드는 과정이 소상하게 적혀있으며, 석 달 후 9월20일에 산역(山役)이 시작된다. 상여를 만들고, 묘지에 들어갈 흙을 고르고, 횟가루를 뿌리고, 축대를 쌓고, 상여꾼 50여 명을 모으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또 보름이 넘게 걸린다. 장장 4개월 동안 장례가 이어졌던 것이다.

'초간일기'를 읽는 내내 구체적이면서도 핍진한 문장에 마음이 끌렸다. "봄보리에 열매가 들지 못했다"거나 "오후에 비가 내려 호미로 땅을 파는 깊이만큼 땅속으로 배어들었다"는 문장이 그러하다. "서리가 눈처럼 내려 목화 싹이 다 시들었다"는 문장은 또 얼마나 아린가. 비록 번역문이지만 문장은 글쓴이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 조선 중기까지 친가뿐만 아니라 외가의 제사를 모시는 '외손봉사'의 기록도 이채롭다. 권문해가 1589년 대구부사로 있을 때 10월에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정여립 등을 체포하라는 왕명이 내려왔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초간의 모습을 보면 그도 당파싸움의 한복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가 보다.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