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오늘이 어떻게 끝날지 아직 모른다

  • 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 |
  • 입력 2024-01-18 06:59  |  수정 2024-01-18 07:00  |  발행일 2024-01-18 제22면
"지금 어두운 터널 지나고
있는 것 같은 누군가 있다면
끝이 어떨지 모르니 그래도
이순간 기쁘게 살아가자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있으니"

2024011701000538500022081
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코로나 때 취소된 항공권을 크레디트로 받았는데 2023년 말까지 예약하지 않으면 자동소멸이라 어쩌다 보니 12월31일 밤 9시에 온라인 예매를 시작했다. 몇 군데 노선을 찾아보다가 그랜드 캐니언이 떠올라 LA행 항공권을 예매하고 크레디트 번호를 넣었는데 안내받은 것과 달리 지불 진행이 안 되는 것 아닌가? 항공사로 전화하니 예상 대기시간 4시간 10분! 자정이 넘으면 크레디트는 소멸되니 안 될 일이라 10시30분쯤 채팅창으로 문의 시작.

그랜드 캐니언과 함께 멋진 새해 첫날을 맞으려던 계획과 달리 창밖은 새해 전야 불꽃놀이 소리가 요란한데, 인공지능 상담사는 도와줄 직원을 곧 보내겠다는 메시지만 무한반복. 결국 자정이 넘어 2024년이 시작되었고, 이렇게 어이없이 새해를 맞았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하던 나는 오기가 생겨 계속 기다렸다. 새벽 1시30분, 드디어 '사람' 상담사 M이 등장했으나 한 시간쯤 후 다른 부서로 이전해야 한다고. 당연히 바로 연결될 줄 알고 물론이지 했는데, 또 한 시간여를 기다린 후 두 번째 '사람' 상담사 P가 등장했을 땐 새벽 3시30분. P가 또 다른 부서로 이전하겠다고 했을 때, 두 번은 속지 않겠다 결심한 나는 이미 5시간을 기다렸고 새해 첫날부터 잠도 못 자고 있다고 강하게 따졌으나 (키보드를 세게 두드리며 타이핑), 결국 또 기다림.

도대체 사람에게 속 시원히 물어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세상이 되었나 한탄하며, 명상하며 배운 알아차림 연습도 하고 조금씩 졸기도 하던 중 어디선가 들리는 사람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아침 7시. 밤새 잊어버리고 있던 전화기에서 들리는 소리에 비몽사몽 간에 대뜸 "Are you a real person?"(진짜 사람 맞아?)이라고 했더니 테레사냐고 묻길래, 테레사는 아닌데 나 지금 9시간째 못 자고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항공사에서 처리 못 하는 일이라는 직원과 목소리를 높이다 그녀는 사라지고, 이제 정말 화가 난 나는 기필코 컴플레인 접수를 하리라며 컴퓨터 앞으로 갔는데 그때 기적처럼 나타난 채팅창의 사람 상담사 M! 그녀는 첫 문장에서부터 뭔가 느낌이 달랐다.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순식간에 예매 완료, 그것도 프리미엄 클래스로. 이 밤이 이렇게 끝날 수도 있구나,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기쁨과 함께 너무 고맙다고 다정한 새해인사를 나누고, 정말 운이 좋은 새해 첫날이구나 감사하며 자러 갔다.

어제 한국의 가족이 보이스 피싱 피해를 당했다며 하루 종일 수습에 분주했다. 짧은 시간 통장의 돈도 인출해 갔다고 들어서 저녁 내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마음 졸였다. 멀리 떨어져 사는 나이 들어가는 부모에 대한 마음, 범죄에 대한 두려움 등 온갖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며 몇 시간을 보낸 후 평화로워진 새벽. 모든 조치를 다 취했고 다시 확인하니 은행 계좌의 잔고도 안전하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너무 무섭고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고 기쁘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이 밤이 이렇게도 마무리될 수 있구나 새삼 경이로웠다.

이렇게 우리는 당장 오늘 하루가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 삶도 그렇다. 그러니 지금 끝없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 같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 끝이 어떨지 모르니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살아가자고, 당신 옆에,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여전히 그 모습의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있다고 다정한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새해를 맞아.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