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북 영천 횡계계곡의 모고헌과 옥간정…주름 깊은 수목들 무성한데…벼랑 걸터앉은 그윽한 존재감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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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26 07:43  |  수정 2024-01-26 07:45  |  발행일 2024-01-26 제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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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정규양의 정자인 태고와(太古窩). 횡계구곡 제3곡으로 1730년에 제자들이 개축하고 모고헌이라 편액 했다. 아래를 흐르는 계류는 홍류담이다(왼쪽). 1716년에 강학당으로 지어진 옥간정. 정자 앞의 계곡은 영과담이다. 주변의 언덕과 바위는 격진병, 광풍대, 지어대, 제월대 등의 이름을 가졌다.
겨울 계곡은 창백하고 윤곽이 흐린 심연들로 풍요롭다. 소리를 지르는 새들도 없어 골짜기는 좋은 꿈을 꾸듯 뒤척임 없이 참 잘 잔다. 계곡은 양쪽 기슭이 거의 수직을 이루는데 벼랑에는 오래되어 주름 깊은 수목들이 무성히 자라나 있다. 그 수목들과 함께 벼랑에 걸터앉아 짙은 녹음과 명랑한 물소리 속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옛집들은 지금 얼음 아래의 물이나 우거진 나뭇가지 속의 영혼처럼 어렴풋하다. 내밀하게 운행하는 천궁에 사로잡힌 듯 표묘하다.

창백하고 윤곽 흐린 횡계마을 계곡
소리치는 새들 없어 꿈꾸듯 겨울잠
정면 2칸·측면 2칸 소박한 '모고헌'
새우잠을 자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옥간정' 입구에 허리 굽힌 느티나무
주자 사모하는 마음으로 구곡 경영
정만양·규양 형제 함께 예 갖춘 듯
정원에는 전설 품은 은행나무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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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 정규양의 정자인 태고와(太古窩). 횡계구곡 제3곡으로 1730년에 제자들이 개축하고 모고헌이라 편액 했다. 아래를 흐르는 계류는 홍류담이다(왼쪽). 1716년에 강학당으로 지어진 옥간정. 정자 앞의 계곡은 영과담이다. 주변의 언덕과 바위는 격진병, 광풍대, 지어대, 제월대 등의 이름을 가졌다.
◆횡계의 훈지형제

물길은 보현산에서 시작되어 마을 한가운데를 횡으로 가로지른다. 그래서 마을도 천도 횡계(橫溪)다. 이름이 한자화되기 전에는 '빗거랑'이라 불렸다. 계곡의 단석에는 도화동(桃花洞)이라는 각자가 있다. 복사꽃이 그윽했을까 혹은 무릉도원이라 여겼음일까. 횡계의 도화동에 영천 사람 훈수 정만양과 지수 정규양 형제가 살았다. 그들은 호수 정세아의 후손으로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자연에 묻혀 살면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 양성에 전념한 학자였다. 시경에 '훈지'라는 말이 있다. '맏형은 흙으로 만든 나팔을 불고, 동생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분다'는 뜻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낸다. 형제는 여기서 한자씩을 따 각자의 호를 훈수와 지수라 했다.

먼저 횡계에 들어온 이는 지수다. 그는 35세 때인 1701년에 횡계의 와룡암(臥龍巖) 근처에 거처를 마련한 뒤 '육유(六有)'라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문집에 '대개 시냇물의 이름이 횡거(橫渠)와 가깝기 때문에 장 선생(장횡거)이 남긴 말을 취해 경계하려는 것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횡거는 북송시대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철학자 장재(張載)의 호다. 육유는 장재의 저서 '정몽(正蒙)' 중 유덕(有德) 편에 나오는 것으로 여섯 가지 덕을 의미한다. 또한 같은 해 지수는 횡계의 벼랑에 태고와(太古窩)라는 움집을 지었다. '아득한 옛날을 그리워하는 집'이다. 그는 '집을 태고로 일컫는 것은 무엇인가. 질박하고 누추한 것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지금 세상의 사람이지만 마음은 태고이다'라고 했다. 태고는 아득한 옛날 경쟁이 없던 시대, 착취로 부귀를 이루지 않는 사회, 즉 일종의 이상향이다. 태고와가 자리한 단애에 도화동 각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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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간정의 입구는 계곡에 면한 내리막길에 있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계곡을 향해 거의 수평으로 누워 차양처럼 드리워져 있다.
지수가 이곳에 자리 잡자 훈수는 자주 왕래하거나 유숙하면서 학문을 이야기하고 간혹 거문고를 타거나 낚시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원근에서 찾아드는 사람들은 날로 늘어나 문밖에는 언제나 신발이 가득했다고도 전한다. 5년 뒤 훈수는 가족을 이끌고 횡계로 들어왔다. 1707년에는 횡계의 상류 고암(高菴)에 고산사(高山社)를 창건했는데 유생들이 왕래하며 공부하던 곳이었다. 후손들은 고산사를 고밀서당(高密書堂)이라 불렀고 서당이 자리했던 굽이는 서당골이라 했다. 1716년에는 태고와 위쪽에 옥간정(玉磵亭)을 지었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위한 강학당이다. 지금 육유재와 고산사는 사라졌고 태고와와 옥간정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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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고헌 뒤에는 300년이 넘은 향나무 한 그루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고 안쪽에는 횡계서당과 동재가 자리한다.
◆모고헌과 옥간정

태고와는 벼랑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다. 현재의 이름은 모고헌(慕古軒)이다. '옛날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집'이라는 뜻으로 1730년에 제자들이 개축하고 편액했다.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모고헌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에 가운데 방을 두고 사방으로 마루를 두른 모습이다. 계곡 쪽에만 계자난간을 두고 나머지는 판문을 달아 막았다. 방은 너무도 작아서 누구든 새우잠을 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자 뒤에는 300년이 넘은 향나무 한 그루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당시 정각사라는 절의 스님이 준 어린 향나무를 심은 것이라 한다. 경내 가장 안쪽에는 횡계서당(橫溪書堂) 현판을 단 강당 한 동과 동재가 자리한다. 횡계서당은 원래 훈지형제를 배향하는 횡계서원으로 건립했으나 훼철되어 서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모고헌 상류에 옥간정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 반의 'ㄱ'자형 누각 건물로 모고헌과 마찬가지로 땅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전면을 다락집으로 꾸미고 뒷면은 아담한 단층으로 앉혔다. 입구는 계곡에 면한 내리막길에 있다. 길 가운데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계곡을 향해 거의 수평으로 누워 차양처럼 드리워져 있다. 허리를 굽히고 다가가 문을 두드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희미한 길의 흔적을 따라 횡계의 물가로 내려선다. 정자 앞에 단을 쌓아 만든 정원이 있다. 듬성듬성 식재되어 있는 배롱나무나 탱자나무 사이에 300년 된 은행나무 거목이 높다. 전염병이 돌 때 이 나무의 열매로 떡을 해 먹으면 병이 예방된다는 전설이 있다.

형제는 횡계에 살며 주자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구곡을 경영했다. 그중 3곡이 태고와, 4곡은 옥간정, 5곡 와룡암, 9곡이 고암이다. 이 외에 1곡 쌍계(雙溪), 2곡 공암(孔巖), 6곡 벽만(碧灣), 7곡 신제(新堤), 8곡 채약동(採藥洞)이 있는데 일부 훼손됐지만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크고 작은 계류와 소(沼), 벼랑에도 이름을 주고 시로 헌사했다. 모고헌 아래의 계류는 홍류담(紅流潭)이다. 형제는 어느 달 밝은 여름밤 제자들과 함께 홍류담에서 뱃놀이를 하며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옥간정 앞의 계곡은 '영과담(盈科潭)'이다. '물은 조금 팬 곳이라도 가득 찬 다음에야 다른 곳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맹자에서 따 왔다. 계곡의 언덕과 바위는 격진병(隔塵屛), 광풍대(光風臺), 지어대(知魚臺), 제월대(霽月臺) 등의 이름을 가졌다. 격진병은 병풍처럼 둘러쳐진 푸른 바위다. '시내 따라 굴곡을 두르고/ 우뚝 솟은 취병이 열리네/ 성시엔 풍진이 넘쳐나는데/ 머리를 돌리니 막힘이 얼마인가.' 저자에는 풍진이 넘쳐나지만 이곳에는 티끌이 접근할 수 없다고 여겼다.

훈수선생은 1730년 67세의 나이로 옥간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종 때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은 '충, 효, 검, 공' 네 글자였다. 제자들에게 남긴 말은 '지려명절(砥礪名節)'이다. '명분 있는 절의를 갈고닦으라'는 의미다. 지수선생은 1732년에 세상을 떠났다. 형제는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수많은 제자를 길렀고 많은 명현과 석학을 배출했다. 나라에서 여러 번 벼슬길을 제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그들은 얼음 아래의 물이나 우거진 나뭇가지 속의 영혼처럼 어렴풋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들은 날아오를 듯 바람 속에서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는 것 같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

20번 대구포항고속도로를 타고 북영천IC에서 내린다. 35번 국도 청송방향으로 가다 옥계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보현산 천문대로 가는 별빛로에 오른다. 약 1㎞ 정도 가면 모고헌이 자리하고 상류로 약 100m 정도 오르면 옥간정이 위치한다. 모고헌 도롯가에 횡계구곡 안내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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