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커피 한잔의 명동 산책

  • 이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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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07 08:03  |  수정 2024-02-07 08:05  |  발행일 2024-02-07 제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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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란〈소설가〉

지난가을 명동의 프린스호텔에 6주간 머물렀다. 호텔 측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소설가의 방'에 입주했던 것인데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주변 산책은 틈틈이 할 수 있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 해찰로는 그만한 것도 없었다. 내게 명동은 관광객들이 넘실거리는 최근의 풍경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래전 분위기로 먼저 다가오는 곳이다.

맨발에 슬리퍼, 운동복 차림으로 목적지 없이 배회하다 보면 소설가 구보씨가 하루 세 번을 들른 장곡천정(현 소공동) 초입의 낙랑파라나 공초 오상순이 매일 출근했다는 청동다방, 주요섭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네모네 다방, 박태원의 소설 공간인 방란장, 그리고 동방싸롱, 갈채 같은 '끽다점'을 더듬게 되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낭만이란 단어를 떠올리자면 언제나 그 옛날의 명동 주변을 먼저 꼽게 되는 건 무슨 일일까. 어쩌면 낭만이 좌절이나 허무 같은 말들과 한 패여서는 아닐까.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으려 낭만을 노래하며 마음을 달래던 식민지 지식인들의 훼손당한 자존심, 전후의 불안 속에 그래도 무언가 지키려던 무력한 힘이 골목마다 서려 있어서일까.

마음이 낭만 언저리를 맴도는 동안 몸은 관광인파에 휩쓸리느라 어리둥절해지기 일쑤였다. 들불처럼 번진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키오스크 앞에 서서 복잡한 조작을 익숙하게 해내는 자신을 뿌듯해하며 받아든 커피를 들고 방향도 없이 걸었다. 가끔은 나 어릴 때 호기심에 좁은 계단을 올라가 들여다보곤 했던 대구 교동의 샤넬 다실과 돌 다실을 떠올리기도 했다. 커다란 수족관이 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도 선명하게 위용을 자랑하던 곳. 번번이 쫓겨나면서도 쪼르르 달려가 낯선 중년 남자의 여식인 양 따라 들어가 보곤 하던 곳. 거기서 커피를 처음으로 구경했던가, 못 했던가.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서 '어느 님이 버리'신 '흩어진 꽃다발'을 찾아볼까 했지만 불가능했다. 명동의 네온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고 흩어진 꽃다발은 어느 거리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엔' '찢어 버린 편지에' 한숨을 흘려보고도 싶었지만 현실의 나는 걸으면서도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어보며 메시지가 오지는 않았나, SNS 알림이 뜨지는 않았나를 확인하는 21세기의 인간이었다.

낭만은 걷는 동안 흥얼거린 '서울야곡' 가사에나 남아 있었을까.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도 해로운 테이크아웃 컵을 든 채 슬리퍼를 끌면서 흥얼거리던 그 가사에 말이다. 이경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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