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자화상에 깃든 두 화가의 삶·예술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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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23 08:06  |  수정 2024-02-23 08:07  |  발행일 2024-02-23 제13면
동서양 두 화가 윤두서와 렘브란트…그림으로 쓴 인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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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자화상', 종이에 엷은 색, 38.5×20.5㎝, 18세기 초, 해남 녹우당 소장(왼쪽), 렘브란트 판 레인, '돌난간에 기대어 있는 자화상', 에칭 20.5×16.4㎝, 1639

"보는 순간 깜짝 놀랐어. 섬뜩했거든."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자화상'을 본 동생의 말이다. 대부분의 반응이 비슷하다. 윤두서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자화상' 한 점에 인생을 압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은 100여 점의 자화상에 파란 많은 인생사를 파노라마처럼 기록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구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렘브란트의 자화상('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전)을 보다가 윤두서의 자화상이 떠올랐다. 17세기 동양과 서양에서 살았던 두 화가의 자화상은 드라마 같은 내면세계를 짚어보고, 동서양 그림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윤두서 자화상 속의 그늘

윤두서는 가사문학의 대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자이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외증조 할아버지다. 남인 계열의 실학사상을 실천한 사대부로 친가와 외가 모두 출중한 가문이었다. 16세에 결혼을 하고, 22세에 부인이 세상을 떠난다. 둘째 부인을 맞이한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지만 집안의 흉사는 끊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뜬다. 세상은 암흑이었다. 당시 서인세력이 정치를 장악하던 시절 남인의 출세 길은 봉쇄되었다.

그의 나이 45세에 양어머니마저 타계하자 서울에서 해남으로 낙향한다. 처절함 속에서 '자화상'을 완성한다. 믿었던 큰 형이 죽자 그의 머리카락은 반백이 되었고, 피부 질환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낙향한 지 3년 만에 48세로 세상을 떠난다.

윤두서는 17세기 남종문인화풍이 유행하던 시절 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화단에 선보인 선비화가였다. 시와 글씨, 그림에 두루 재능을 갖춘 학자로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대부호인 가문을 이끌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중국에서 발간한 '화보(畵譜)'를 보고 그림을 익혔다. 마구간에서 하루종일 말을 보고 관찰하여 스케치한 후 작품을 완성하고, 머슴을 모델로 미세한 표정까지 스케치하며 기량을 닦았다. 밭갈이 하는 농부, 나물 캐는 아낙, 돌 깨는 석공, 짚신 삼는 농부 등 농사를 짓거나 아낙네가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인물 동작은 자연스럽고 얼굴표정은 세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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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판 레인,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 에칭 10.4×9.5㎝, 1636

◆렘브란트 자화상의 빛과 그림자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에 있는 대학의 도시 레이덴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서 25세에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17세기 경제의 활성화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초상화를 원했고, 렘브란트에게 초상화 주문이 밀려들었다. 뛰어난 기량으로 명성과 경제력을 얻었다. 1634년 28세에 부유한 집안의 사스키아와 결혼한다. 고급 주택을 구입하여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고 화려한 삶을 만끽했다.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렘브란트는 정형화된 초상화에 변화를 시도한다. 모델의 꾸며진 외모를 탈피하고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아름답게 꾸며줄 초상화를 기대했던 주문자들은 곧 실망하고 만다. 점차 초상화 주문이 줄어들었고, 경제 사정은 어려워졌다. 1642년에 제작한 집단 초상화인 '야경' 또한 주문자에게 외면을 받는다. 설상가상 아내 사스키아마저 사망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골동품과 작품을 사 모았다. 빚이 늘어서, 결국 1656년 50세에 파산한다. 집과 수집품들은 경매에 넘어갔다. 다행히 두 번째 아내를 만나 몰락의 경지에서 벗어났지만 불행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와 아들이 세상을 떠났고, 다시 가난에 시달렸다. 그는 몇 벌의 헌 옷과 그림 도구만 남긴 채 63세에 생을 마감한다.


서민을 주로 그린 선비화가 윤두서
출중한 실력 발휘 못한 아픔 담아
완벽한 얼굴모습 철저한 삶 대변

가족 죽음과 파산 후 그림에 전념
렘브란트 100여점 내면세계 기록
자화상, 그들의 인생 압축한 자서전



렘브란트는 생전에 회화 300점, 동판화 300점, 드로잉 2천점을 남겼다. 그중 100여 점의 자화상이 있는데, 회화 40여 점과 판화 40여 점이다. 그의 초상화는 빛과 어둠을 대비시킨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사용하여 극적 대비효과를 표현했다. 렘브란트는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인물 그림으로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판화가 유행했는데, 렘브란트는 유화 못지않게 정교한 에칭기법을 사용한 동판화로도 인정을 받았다.

1630년에 그린 '모자를 쓰고 웃는 자화상'은 오른쪽에서 밝은 빛을 받아 명랑한 얼굴이고, '소리치는 듯 입을 벌린 자화상'은 얼굴을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다. 머리카락은 거칠고 자유롭다. '부드러운 모자를 쓴 자화상'(1634)은 맑은 눈빛에 정면을 바라보는 미소년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1636년에 제작한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아내 사스키아를 스케치하다가 정면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부드러운 필치가 섬세하고 정교하다. 아내와 함께 취한 포즈로 단란한 한때를 보여준다. 반면에 '돌난간에 기대어 있는 자화상'(1639)은 눈빛이 예리하고 강렬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흑백의 대비가 돋보인다. 그는 인물화에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입체감과 미묘한 표정, 자연스러운 포즈로 내면의 세계를 우러나게 했다.

◆자화상으로 본 동·서양화의 세계

윤두서의 호 공재는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으로 그의 '자화상'과 오버랩된다. '자화상'은 윤두서의 임종게송(臨終偈頌)이 되어 영원히 살아 울림을 준다. 밝은 색채의 얼굴에 반듯한 이마, 꼬리를 올린 수려한 눈썹이 범상하다. 쌍꺼풀에 또렷한 눈망울이 투명하다 못해 감상자가 빠져들 것만 같다. 둥근 콧방울이 중심을 잡고, 입술을 덮은 수염이 근엄하다. 출중한 기세를 펼치지 못한 시대의 아픔을 한 올 한 올 수염으로 빼곡하게 눌러 그렸다. 완벽한 얼굴모습은 철저한 그의 삶을 보는 듯하다.

동양화는 사물을 그대로 표현한다. 빛의 영향을 받지 않아 그림자가 없다. 붓으로 선의 강약을 조절하여 외형을 그리고 먹의 농담으로 표현한다. 사물을 화면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여백을 두어 그림을 완성하였다. 여백은 상상의 공간이었다. 동양화는 화가의 기운을 불어넣어 생동하게 만든다. 바로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초상화는 그 사람의 인품과 성격,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전신(傳神)'이 가장 중요하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전신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그는 서양의 음영법을 받아들여 정물화를 그렸던 만큼 '자화상'에도 서양화법을 구사하여 묘사가 사실적이다.

렘브란트의 '63세의 자화상'은 1669년에 유화로 그린 마지막 자화상이다. 무늬가 없는 단색의 모자를 쓰고 주름진 얼굴에 밝은 눈빛이 초연하다. 죽기 전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듯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표정이다. 서양화는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사물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동양화처럼 한 번의 필획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두껍게 덧칠하며 천천히 표현한다. 서양화임에도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전신'의 느낌이 묻어난다.

◆자화상으로 쓴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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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화가)

동양과 서양의 두 화가에게 그림은 인생의 무게를 지탱해준 빛이었다. 순탄한 삶이 어디 있으랴만 질병과 죽음은 그들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부와 학식을 갖춘 윤두서는 연이은 흉사에 오로지 그림으로 위로를 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부와 명성을 거머쥔 렘브란트 역시 가족의 죽음으로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마지막엔 파산을 겪고, 오롯이 그림에 전념하며 화가로서 생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들의 자화상은 곧 자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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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기자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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