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한라산에서 미어캣을 보다

  • 이은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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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19 07:09  |  수정 2024-02-19 07:10  |  발행일 2024-02-19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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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변호사

어느 해 4월 사법연수원 동기인 언니들과 한라산에 오르기로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6명 중 나를 포함한 나머지 5명은 평소 운동을 하지 않고 그냥 숨만 쉬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한라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산행을 하고 TV 애국가 화면에서나 보던 백록담을 직접 본다는 것에 들떠 있었다. 다들 등산이라는 것은 다리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가서 한라산으로 직행했고, 성판악으로 올랐다가 관음사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봄날의 한라산 초입 숲길은 자연이 주는 색이 사람을 치유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5명은 숲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즐겁게 떠들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무계단 길과 현무암 돌길의 무한 반복을 경험하면서 점점 대화가 줄었다. 조금씩 지치면서 각자 가져온 물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물이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며 도달한 곳이 정상이 아니라 진달래 대피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생각이 많아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발도 너무 아팠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이미 세 명의 일행이 정상행을 포기했다. 나도 정상으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하산 채비를 하던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습니다. 정상에 가실 분들은 지금 올라가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 홈쇼핑에서 3만9천900원 하는 상품이 매진 일보 직전이라는 말을 들을 때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으려던 순간, 나는 마지막 남은 한 개의 물건을 잡기 위해 몸을 던지는 사람처럼 정상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이제 뒤돌아갈 수 없어서 정상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고사한 나무들이 보이고, 나는 한라산에 왜 오자고 했을까 후회하며 걸었다. 숨이 차고 다리도 아프고 그냥 누워버리고 싶었는데, 뒤에서 등산객들이 계속 올라오니 소 몰 듯이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어느 시점에서는 도저히 걸을 수 없어서 계단에 앉아 있는데, 고사한 나무들 사이에서 미어캣이 튀어나와 내 앞에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사라졌다. 분명 동물원에서 본 미어캣이었다. 나는 이날 1·4후퇴 하는 사람처럼 터덜터덜, 만신창이가 되어 정상에 올랐고 말라비틀어진 백록담을 보자 억울함이 밀려왔다.

하산 때는 너무 힘들어서 일행과 대화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고, 나의 등산화는 너무 커서 하산길에 발톱이 아팠다. 또 어찌나 화장실에 가고 싶은지. 조금 더 가면 화장실이 있겠지 하고 참고 걸었지만, 끝도 없이 걸어도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하산 내내 머릿속엔 화장실 생각이 가득했다. 누군가 한라산 등반의 필수품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강한 콩팥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날 산이 어두워지고 산 아래 있는 일행들이 조난신고를 하려던 때에 겨우 하산했다. 나는 발톱이 두 개나 빠졌고, 검색해보니 미어캣은 아프리카에나 산다고 했다. 헛것을 본 것이다. 다시는 산에 가지 않을 것 같았는데 한라산 등반으로 고통에 대한 역치가 커진 것인지 근심 걱정을 내려놓게 되는 무념무상의 그 시간이 좋았던 것인지 산이 자꾸 생각났다.

이후 산에 가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산에 가면 내가 돌이 되고 나무가 되고 산이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어째서 그토록 산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예전에는 혼자 산에 오르면 이상한 사람을 만날까 봐 주저했는데, 지금은 종종 혼자서도 산에 오른다. 이상한 사람은 산이 아니라 회사에 있는 법이다.

이은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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