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진시황은 만무방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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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9 08:12  |  수정 2024-03-29 08:12  |  발행일 2024-03-29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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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소설가

1974년 3월29일 진시황릉이 발견되었다. 진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운 지 불과 15년 만에 멸망했다. 분서갱유로 무모한 사상 통일을 시도하고, 만리장성 축조로 백성들을 못살게 핍박한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예기'에 "혹독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라는 금언이 나온다. 학정보다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 당나라 위징은 태종에게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엎기도 한다(水能載舟亦能覆舟)"라고 지적했다. 이때 물은 백성이다.

당은 진보다 약 840년 뒷날 국가이다. 시황제는 "수능재주역능복주"의 진리를 직접 배운 바 없었다. 하지만 여론은 쇠도 녹인다는 중구삭금(衆口삭金)은 시황제 이전인 춘추시대 좌구명의 '국어'에 나온다. 중구삭금의 진리를 무시한 시황제의 인식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상급 사람, 배워서 아는 차등급 사람, 곤란을 겪고 나서 배우는 차차등급 사람, 곤란을 겪은 뒤에도 배우지 않는 하급 백성이 있다고 했다. 진시황은 곤란도 겪지 않고 배우지도 않았으니 제5 인간형인가?

진시황을 그렇게 평가할 만한 예화들은 무수하다. 불로초 이야기가 단적이다. 진시황의 명을 받은 사람들이 제주도까지 왔다고 전해진다. 진시황은 당시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킬 때 쓰던 어휘 '짐'을 자기 혼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1937년 3월29일 타계한 김유정의 단편 '만무방'은 진의 파멸을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응칠은 전과 4범으로 동생에게 얹혀살고 있다. 만무방은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동생 응오는 혹독한 지주 김참판의 수탈에 저항해 추수를 거부한다. 응오의 소작 논에 밤마다 도둑이 숨어들어 벼이삭을 잘라간다. 사람들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느낀 응칠은 도둑을 잡기 위해 잠복한다.

이윽고 야심한 시각에 수상한 사내가 나타나 벼이삭을 자른다. 응칠이 기습해 사내를 물씬 두들겨 팬다. 그런데 복면을 벗겨보니 동생 응오 아닌가! 응오가 항의한다. "내 것 내가 먹는데 누가 뭐래?" 응오 같은 하급 백성이 제 것을 스스로 먹는 경우에는 누가 뭐라고 말할 일도 없다.

진시황은 제 것이던 천하를 말아먹었다. 국가 지도층 등이 제 것이라며 삼키는 것에는 만민의 공유물이 많다. 진시황 같은 국가적 만무방이 21세기 대명천지에는 없는지 '주인'들은 잘 살펴야 한다. 그 한때가 선거철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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