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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작품', 캔버스에 유채, 130×194㎝, 1964 (왼쪽)· 정점식, '밤의 노래', 캔버스에 종이·아크릴, 74.5×120㎝, 1991 |
두 명의 화가가 있다. 둘 다 추상화로 일가를 이뤘다. 한 명은 서울을 무대로 활동했고, 한 명은 대구를 무대로 활동했다. 한 명은 서울 중심의 미술계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고, 한 명은 자신이 터 잡은 지역을 또 다른 추상화의 산실로 가꾸며 고요히 빛났다. 두 화가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때 같은 협회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1957년에 발족한 '모던아트협회' 회원으로, 이 협회전과 1957년에 개최된 '현대작가초대전'에 회원으로 함께 참가했다. 누구일까? 한국 추상화 1세대 화가인 유영국(1916~2002)과 극재 정점식(1917~2009)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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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작품', 캔버스에 유채, 133×133㎝, 1973, 대구미술관 소장 |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의 큰 발자국
유영국은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제2고보(현 경복중고) 4년을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1935년 19세에 도쿄 문화학원(文化學院) 유화과에 입학한다. 1937년 제7회 독립미술가협회전과 제1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각각 '입선'을 하고,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는 '최고상'을 수상한다. 그는 '나무부조'라는 실험적인 경향을 선보이며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했다. 기하학적 추상은 자연으로부터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조형요소에 의한 순수한 구성을 시도한 것이다.
1943년 귀국해 고향 울진에 정착한다. 광복이 되자 서울대 교수로 부임하고, 순수추상운동에 작가들을 결속시킨다. 1947년 김환기(1913~1974), 이규상(1918~1967)과 더불어 순수한 조형이념의 결속체인 '신사실파'를 결성한다. '신사실파'는 1953년 전쟁 중 부산국립박물관에서 3회전으로 끝을 맺지만, 그들은 부단한 노력으로 추상미술 정립에 빛을 더했다. 1957년에는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한다. 순수추상을 지향한 작가, 표현주의와 후기입체파 경향의 작가, 구상을 표방한 작가 등 여러 성향의 작가들이 모였다. 추상이라는 공통적인 지향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성적인 작가들의 결속력이 관건이었다. 지역에서 활동하던 정점식, 문신, 김경 등이 참여했다. 그 해에 조선일보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에도 참가하는 등 유영국은 추상화 확산에 적극 나섰다.
자연을 바탕으로 한 순수추상미술은 자연의 형상에서 모티프를 취하거나 문학, 음악에서 차용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을 배제한 미술 자체로 돌아가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추상은 점면색채로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 1966년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한 유영국의 작품을 보고 비평가 이경성(1919~2009)은 "유영국씨의 작품은 면으로 이룩되는 구성공간이라고 할까. 강렬한 색가를 지닌 면의 대담한 대비로써 커다란 시각의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 그 원색의 대비나 면의 배치는 이 작가의 우미(優美)보다는 장미(壯美)의 세계를 추종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 바 있다.
이 시기의 '산' 시리즈는 자연에서 받은 감동이 오랫동안 내면에 잠재해 있다가 밖으로 분출된 것이었다. 그는 "자연을 바탕으로 하여 순수한 추상적인 상태를 형상화한다"는 생각으로 붓을 들었다. 1964년 첫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은 트레이드마크인 '산' 시리즈의 출발점으로 보인다. 산이 가진 오묘한 매력을 색채로 표현했다. 밝은 녹색의 하늘과 짙은 녹색의 바탕에 주황과 빨강의 뾰족한 깊이감은 숲이 지닌 제각각의 모습을 표현했다. 붉은 면의 색채가 서서히 물들고 각각의 색채가 바람처럼 변한다. 넓은 면에 긴장감을 더하는 색채들이 산을 품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추상은 점차 부드럽고 색채도 강렬해진다. 1973년에 그린 '작품'은 단풍이 붉게 물든 완연한 산의 형상이다. 절제된 선으로 색채를 분리하고 강렬한 색채로 화면을 장악했다. 붉은 색채의 산 모양은 산의 깊이를 더한다. 여러 모습의 산이 겹쳐 있고, 보라색 면을 가로로 배치하고 푸른색을 가늘게 분할했다. 푸른색은 하늘이 되었다가 멀리 흘러가는 강물이 된다. 유영국의 작업은 인생만큼 치열했다. 추상화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오로지 색채를 연구하고 면을 분할하며 조형세계를 확장했다. 말년에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꿋꿋하게 작업에 매진했다. 그 불굴의 노력이 곧 우리 현대미술의 찬란한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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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식, '상황', 나무에 유채, 98.5×55.5㎝, 1956, 계성고 소장 |
◆정점식, 진정한 '모던아트' 작가
정점식은 유영국과 더불어 모던아트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럼에도 평생 대구지역에서 교육자이자 비평가, 작가로 활동한 탓에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말년까지 모던아트의 이념을 실천한 추상화가로 평가받는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정점식은 7세 때 대구 약전골목에서 한의사를 하던 고모부에게 한문과 서예를 배운다. 후반기 작품세계의 특장인 서체적 기질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36년 19세 때, 제1회 남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며 공적으로 재능을 인정받는다. 이때 받은 상금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1938년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 입학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피해 만주 하얼빈으로 간다. 하얼빈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하얼빈미술가협회전에서 '쌍화상'을 수상한다. 1946년 29세에 귀국해 대구에서 작가의 인생을 시작한다.
1953년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첫 개인전을 갖고, 2년 후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다. 전시장에 유영국, 김병기, 김영주, 한묵, 이규상 등이 방문하여 현대미술의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그들의 만남은 1957년 모던아트협회 발족으로 이어졌다. 정점식은 현대작가초대전에도 참가한다. 1964년 계명대 교수로 부임하고, 대구 화단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한다.
◆평생 그린, 남들이 모르는 그림
"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남들이 모르는 그림을 그린다는 말들을 무던히 들으면서 오십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예술은 그와는 다른 경지에서 영위되고 있는 세계라고 나는 믿어왔기 때문이다. 비실용적인 것의 필요성, 종교나 예술은 우리들의 생활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십이 넘어서 아직 이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여러분들 앞에 이것을 내놓게 된 것을 사하는 바이다." 1971년, 개인전 서문에서 자신의 추상화 작업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그는 일관되게 '남들이 모르는 그림'에 몰두했지만 주변에서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추상화를 하다가 '남들이 아는 그림'(구상화)으로 돌아선 화가들이 적지 않았다.
작품 '상황'은 1956년 작으로 두 명의 인물이 부둥켜안고 서 있는 모습이다. 일정한 폭을 지닌 선으로 인체 형상을 리드미컬하게 단순화했다. 리드미컬한 형상은 그러나 매우 주도면밀한 구상을 토대로 조심스럽게 채색한 것이다. 더욱이 인체를 구획하고 있는 각 면의 폭이나 색상 등의 언밸런스한 안배와 조화가 결코 단번에 그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간결한 곡선의 조형적인 율동이 작품에 끊임없는 활력을 자가발전하게 한다. 1957년 작 '실루엣'과 통하는 세련된 추상이다.
1989년 작 '바람의 노래'는 리듬감과 율동성을 통해 바람의 느낌을 환기시킨다. 색 면과 빠른 붓질이 바람처럼 움직인다. '밤의 노래'(1991)는 그가 추구한 서체적인 필치가 가장 자유롭게 드러난 작품이다. 모필의 거친 느낌이 화폭에 돌풍을 일으킨다. 언뜻 붉은 색이 빠르게, 점처럼 이어진다. 마치 여인이 사물놀이하듯 날렵하게 점프하는 것 같다. 붉은 붓질이 그림의 균형을 잡아준다. 이 대목에서 정점식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예술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대용물이다."(몬드리안) 그림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균형을 이룬 평형상태는, 그에게 인간사에서도 소중한 덕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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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화가 |
◆우리의 정신적 자산을 지키는 일
유영국과 정점식의 도록을 펼쳐본다. 한 사람의 생이 담긴 도록은 그 시대의 역사이다.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도 어렵지만 작품을 오롯이 보존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유족들이 든든한 지킴이로서 두 작가를 지키고 있다. 유영국의 유족은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유영국의 추상미술을 널리 알린다. 정점식의 유족도 '정점식미술이론상'을 만들어 우리 미술계에 기여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의 예술가를 기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다. 두 작가는 우리 모두의 정신적 자산이다.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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