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사를 찾아서] 오경의 前 한국마사회장

  • 입력 2006-05-01   |  발행일 2006-05-01 제28면   |  수정 2006-05-01
'말'처럼 힘찬 삶…경마산업 중흥 큰 공로
타고난 끼·배짱에 거침없는 화술, 보험왕·국회의원·경마首長 지내
80년대엔 씨름 해설위원으로 명성
[출향인사를 찾아서] 오경의 前 한국마사회장

인생에서 반전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라진다.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지만 운이 좋으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사람, 극적인 반전을 거듭하면서도 운이 억세게 좋았다. 오경의 전 한국마사회 회장(66·현 서울마주협회 회장·경마발전위원회 위원장). 알고보면 오 회장은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다. 프로씨름이 안방극장을 장악한 1980년대 초반 KBS 해설위원으로 인기를 날렸고, 90년대 후반기엔 한국씨름연맹 총재도 역임했다. 고향인 안동에서는 1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 활달한 성격에 넘치는 '끼', 거침없는 화술에 빠져 기자는 오 회장을 만난 지 4시간이 지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씨름왕 독차지…부유한 어린시절

오 회장은 1940년 안동 와룡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그는 학창 시절 씨름왕을 휩쓸 정도로 강골이었다.

"정말 씨름 하나는 잘했어요. 씨름왕이 돼 수차례 소를 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뒤늦게 학교에 들어온 아버지뻘 되는 선배들도 꼼짝없이 무너졌지요."

당시 부친이 안동 16개 읍·면에 땅을 모두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광복 직후 정부의 토지개혁 단행으로 집안이 몰락하면서 중학교 졸업장을 따지 못했지만 검정고시를 거쳐 안동 경안고에 입학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생계를 위해 양계업을 시작했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가 바로 조성하씨(현 부산일보 자회사 사장)와 이동운씨(학원장)다.

"대구·경북 부화장에서 병아리 30마리를 샀어요. 고향집에서 1년 동안 병아리를 키우며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이듬해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는 그럴수 없었다. 여동생이 식모살이를 가는 마당에 혼자 유학을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보험세일즈맨에서 정치인으로 입문

그래서 택한 것이 보험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동방생명(현 삼성생명보험)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보험왕'으로 등극했다. 남다른 수완과 친화력 덕분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였죠. 세일즈맨으로 그런 큰 돈을 벌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집안의 빚도 어느 정도 갚아갈 무렵 평소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63년 신민당에 입당했다. 당원으로 계속 활동하면서 8대 박해충 의원의 보좌관을 했고, 10대에는 야당내 보좌관회 회장을 지냈다. 이때 당시 신민당 원내 총무였던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공·사석에서 자주 만나게 되면서 정치적인 꿈을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그는 85년 고향 안동에서 12대 총선에 출마해 낙선한 이후 13대에 이르러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14대 때 재도전을 했으나 학력 위조 사건에 말리면서 정치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력서에 '중학교 졸업'이라고 쓴 게 화근이 돼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 81년부터 85년까지 KBS 스포츠 해설위원을 역임했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 명 해설가로 인기

'씨름은 넘어지면 집니다.' 80년대 초반 KBS 씨름 해설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그가 던진 이 말은 모든 일간지 스포츠면에 대서특필됐다. 당시 씨름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방송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시청률이 70%를 육박했고, 9시 뉴스가 30분 이상 늦춰져 방영된 때도 있었다. 여기서 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이만기·이봉걸·이준희 등 기라성 같은 선수의 인기와 함께 그는 특유의 입담과 재치로 시청자들을 안방극장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해설은 풍류와 해학 그 자체였다. 구수한 한자성어와 감탄사가 곁들여진 그의 해설을 들으며 남녀노소 모두가 재미 있어 배꼽을 잡았다.

그는 스포츠해설가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81년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전국장사씨름대회에 나올 예정이던 해설자가 사정이 생겨 방송 펑크를 낸 게 그가 방송을 시작한 계기였다.

"대한씨름협회 경북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죠. 마침 전국장사씨름대회 장소인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대한씨름협회 회의에 참석 중이었는데 오후 2시 예정인 씨름대회의 해설위원을 급하게 찾는다는 연락이 왔어요. 다들 저를 추천하더군요. 그래서 얼떨결에 방송을 맡게 됐어요."

그는 그 후 각종 스포츠 해설가로 불려다녔다. 다른 스포츠 종목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지만(소위 '앵무새 해설가'였지만) 시청률을 올리려는 PD들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후에 그는 대북방송까지 맡아 인기를 얻었다. 끼는 타고 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방송계에서는 그를 원초적이고, 동물적 본능이 탁월한 방송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경마 3권' 장악 유일

오경의는 최근 열린 경마발전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재선임됐다.

그는 우리나라 경마 관련기관의 삼각축이라 할 수 있는 '한국마사회' '서울마주협회' '경마발전위원회'의 수장을 모두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93년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마사회 회장을 맡았죠. 전임 회장들은 모두 군인 출신이었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임기를 다 채우고 '3권'을 다해본 사람은 저 혼자 입니다."

그가 한국마사회 회장으로 재임하던 93년부터 96년까지의 기간은 한국경마산업이 가장 급속도로 성장한 시기였다. 경마팬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매출액도 가장 큰폭으로 늘었다. 워낙 활동영역이 넓고 벌여놓은 일도 많아서 내부적으로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으로 남게 마련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우리나라 경마산업을 중흥시킨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든 돌이 있어야 얼굴이 붉어집니다"

오 회장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입담이 좋고 배포가 큰 사람"이라고 말한다. 당시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사표를 냈을 때 KBS 이원홍 사장이 "방송으로 계속 가면 세계에 따라올 사람이 없다"며 극구 말렸던 일화는 그의 인기가 당시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13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도 그의 입심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88년 노태우 정권 시절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 광주특위청문회 간사장을 맡아 활약하기도 했다. 또 국회 의사 진행 발언을 통해 본회의에 지각하는 동료의원들을 향해 "사람이 도리를 지키기 위해선 '수시(守時), 수분(守分), 수임(守任)'해야 한다"고 일갈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입담만으론 부족하다. 그의 생활신조는 '정직과 성실'이다. "마음은 넓게, 생각은 깊게, 행동은 신중하게"라는 신조는 그가 지금까지 맡은 단체를 소신 있게 이끌어온 원동력이 됐다.

"든 돌이 있어야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는 인생사 모두가 자기 한 만큼 돌아온다고 강조한다.

[출향인사를 찾아서] 오경의 前 한국마사회장
2005년 서울마주협회장배 대상경주 시상행사에 참가한 오경의 전 마사회장.(오른쪽에서 3번째)
[출향인사를 찾아서] 오경의 前 한국마사회장
2005년 스포츠투데이배 대상경주 시상식에서 대상을 차지한 '뇌천'의 마주인 김지미씨(영화배우)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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