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맛길기행 .76] 日食 이야기- (10) 물회

  • 입력 2006-09-05   |  발행일 2006-09-05 제22면   |  수정 2006-09-05
(제자 : 蘭汀 李美蘭)
[경상도 맛길기행 .76] 日食 이야기- (10) 물회
대구 포항물회식당의 물회.

어부 K씨는 새벽같이 일어났다. 하늘엔 아직 별이 총총, 아내는 취침중. 간밤에 먹은 소주가 또 위벽을 긁기 시작한다. 찬장에서 고추장만 끄집어내 가방에 넣고 선창으로 향한다. 동료들과 함께 통통배를 타고 난바다로 간다. 동녘이 희붐해질 때쯤 일을 끝냈다. 그때서야 K씨는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선주는 익숙한 솜씨로 갓 잡은 가자미를 칼로 저며 선원들에게 나눠준다. 순간 갑판은 널찍한 도마로 변한다. 준비한 양념이라고 해봐야 고추장과 된장이 전부. 선원들의 회 먹는 방법도 가지가지. 회를 고추장에 찍어먹기도 하고, 중간에 목이 마르면 물에 말아 먹기도 한다. 고추장이 물리면 된장을 조금 섞기도 한다.

K씨는 자기 몫으로 온 회를 양은그릇에 넣고 먼저 고추장으로 잘 비빈다. 물부터 부으면 양념이 살 속으로 잘 스며들어가지 않기 때문. 고추장이 잘 묻은 회 위에 물을 넣고 냉국처럼 후루룩 마신다. 비로소 몸에 피가 돈다. 시간이 갈수록 선원들은 좀 더 나은 물회 요리법을 찾았다. 어떤 이는 식초도 좀 넣고, 갖고간 오이를 채썰어 넣기도 했다. 나중에 채썬 배가 주재료가 된다. 맛을 더 내기 위해 사이다를 섞기도 했다. 모든 방법이 다 강구됐다. 어부들은 태풍 등 기상특보가 내려지면 비오는 날의 공사장 인부처럼 논다. 그런 날일수록 물회 생각은 더욱 간절한 것. 물회도 중독된다. 먹지 못하면 담배처럼 '금단 증상'을 보인다. 그래서 직접 집에서 만들어먹기도 하고 귀찮으면 식당 주인에게 물회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그런 배경을 안고 바닷가에서부터 물회식당이 생겨나 도시로 확산됐다. '국밥'같은 물회, 어민들에게는 사철 즐길 수 있는 '패스트푸드형 해장국'이었다. 남편을 위해 물회를 만들어주던 아내들이 훗날 자식 학비 등을 벌기 위해 물회 식당을 열었다.

#한국의 3대 물회 본산지-포항·속초·서귀포

물회? 현지 어민들에겐 그렇게 특별한 먹거리는 아니다. 그런데 물회가 도시인들에겐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별식으로 정착했다. 최근 들어 하절기 물회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세를 보인다. 상당수 지역민들은 포항 물회만 있는 줄 안다. 그건 아니다. 한국의 3대 물회 본산지는 포항과 강원도 속초, 제주도 서귀포.

강원도 물회의 주재료는 오징어이다. 특히 속초는 오징어 물회의 고향이고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가진리는 '오징어 물회마을'로 통한다. 그곳 물회는 이미 관광상품. 현재는 오징어(성어기는 7~9월) 물회철이다.

경북 동해안이라도 구역마다 물회 종류가 다르다. 울진~영덕~울릉도는 오징어가 선호되는 반면, 포항에선 주로 흰살 생선인 광어·도다리·가자미·우럭 등이 인기다. 하지만 같은 바닷가라도 동해와 달리 서남해에선 물회를 좀처럼 찾기 힘들다.

자리물회는 제주도의 대표 물회다. 자리돔(일명 자리)은 5~8월 제주도 근해에서 잘 잡힌다. 서귀포 보목리 포구는 서귀포 자리물회의 고향같은 곳이다. 자리물회는 오이·깻잎·미나리·쪽파를 채로 썰어 된장을 풀고 설탕·식초·소금·고춧가루·깨소금으로 간을 맞춰 시원한 물을 넣고 얼음 몇 조각 띄우면 된다. 오징어 물회도 이처럼 요리한다.

포항 물회에는 식초가 잘 들어가지 않지만 자리돔회에는 식초가 들어간다. 오징어 물회는 흰살 생선과 달리 양념이 오징어속으로 잘 배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채를 썰 때 아주 가늘게 썰어야 된다. 대신 광어와 도다리는 너무 가늘게 썰면 씹히는 맛이 없어 맛이 감소된다.

물회의 묘미는 섞는 수량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국물 맛. 물이 늘어나면 양념 맛도 옅어진다. 다 먹을 때까지 몇번이나 바뀌는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밥을 어떻게 먹을지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부터 밥을 넣고 비빔밥처럼 비비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 뜨거운 밥이 들어가면 회가 금방 익어버린다. 양념이 가미된 회를 먹고난 뒤 고추장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게 정석이다. 식초 사용에 유의해야 된다. 공업용 식초가 들어가면 회가 쉬 익어버린다. 만약 사용할 경우 과일식초가 바람직하다. 식초를 과하게 타서 물이 많이 들어가게 되면 맛을 망치게 되니 가능한 한 식초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물회용으로 참치와 같은 붉은살 생선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쉬 물러버리기 때문이다.

#물회의 대표주자 포항물회

현재 포항 북구 지역에만 모두 258개의 횟집이 있다. 물론 평소 땐 각종 회를 팔지만 주문하면 물회를 말아준다. 물회는 이제 포항의 대표적 향토음식이 돼버렸다. 하지만 '포항 물회'란 상호는 특허를 못낸다. 포항이란 지명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지에도 숱한 포항 물회 식당이 생겨나고 있다.

포항시 번화가 상원동 패션거리 입구에 자리를 잡고 있는 55년 역사의 포항물회집. 포항물회의 원조로 불린다. 1950년대 옛 포항시청 근처에 3대 물횟집이 생긴다. 바로 포항·영남·부산식당이었다. 영남과 부산은 사라지고 포항만 살아 있다. 옛 시청 근처에 세무서, 경찰서, 소방서, 영일군청, 전매소, 등기소 등 각종 관공서와 금융기관 등이 몰려 있어 장사하기 좋았다. 물론 타지에서 온 공무원들이 물회 맛에 반해 소문을 냈고 이로 인해 포항이 물회의 고장인 것으로 알려진다. 포항사람들은 타지의 지인들이 오면 포항물회식당으로 데려갔다.

2004년 타계한 포항물회 할매 김덕순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포항물회의 산증인이었다. 김씨 할머니는 영남물회(66년쯤 시청 옆에서 문을 열었다가 92년쯤 폐업하고 영남해물탕으로 업종변경됐다가 지난해 이 업소도 폐업) 허복수 할머니(포항 흥해 출신으로 2005년 81세로 타계)와 함께 '포항의 양대 물회 할매'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포항물회 옆에 부산 물회도 있었지만 훗날 주차장 시설 미비로 고정 손님을 놓치는 바람에 일찍 하차를 한다.

김씨 할머니는 물횟감으로 가자미, 도다리, 광어, 우럭 등 네 가지 생선만 잡았다. 김 할머니는 2남2녀를 두었지만 교수가 된 장남의 뒷바라지를 위해 가업을 친구인 포항 출신 윤한본 사장(55)에게 넘겨준다.

타계한 허씨 할머니의 남편 김권문씨(88년 작고)도 물회에 조예가 깊었다. 김씨는 늘 배에서 물회를 만들어 먹었는데, 회 치는 솜씨가 빼어나 부두에 식당을 차리라는 권유도 받았다. 결국 부부는 3남2녀의 학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 방 2개와 식탁 4개를 가진 물회 식당을 연다. 부부는 죽도시장에서 고기를 사와 고추장, 설탕, 참기름, 마늘과 깨를 넣어 물회를 만들었는데 오이는 회맛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사용하지 않았다.

#물회의 진화-퓨전 물회도 등장했다.

물회도 퓨전화되고 있다.

KBS대구방송총국 초입의 연해정 횟집의 여서구 주방장은 전국을 돌며 물회 노하우를 토대로 수십종류의 한방재료로 만든 한방 물회를 개발했다. 포항물회와 달리 고추장과 한약재가 가미된 국물을 미리 살짝 얼려 회 위에 부어준다.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미광스포렉스 건너편에 있는 일식집 죽노는 해초 물회로 유명하다. 가자미, 도다리, 전복, 해삼은 물론 해초, 톳, 고시래기, 바재기 등의 해초류와 메밀까지 들어간다. 물만 붓는 다른 집과는 달리 양파, 당근, 배, 파 등 10여 가지 채소에 감초·다시마를 넣어 3~ 4시간 고아 살짝 얼린 육수를 사용한다.

[경상도 맛길기행 .76] 日食 이야기- (10) 물회
포항물회
[경상도 맛길기행 .76] 日食 이야기- (10) 물회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KBS 대구방송총국 골목에 있는 연해정 횟집의 한방물회.
[경상도 맛길기행 .76] 日食 이야기- (10) 물회
55년 역사의 포항시 북구 상원동 포항물회 전경.
[경상도 맛길기행 .76] 日食 이야기- (10) 물회
40년 역사를 가진 대구시 중구 동인동 포항물회식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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