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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김선식의 작업실 앞마당에는 100년은 족히 넘었을 소나무가 많다. 버섯모양 지붕의 집과 소나무가 멋진 조화를 이뤄 평온함을 주는 앞마당에서 김 도예가가 포즈를 취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1970년 문경에서 태어났다.
1998년 전승도예대전 입상을 시작으로 동아공예대전 입상, 현대미술대전 특별상 등을 받았다. 2005년 대한민국 문화예술부문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2004년 대덕문화전당, 2008년 서울 성남아트센터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년마다 자선전을 열어 수익금을 기부하는 행사도 갖고 있다. 서울 금호미술관, 중국칭다오총영사관 초대전, 한·미문화재단 초청 미주 순회전 등 다수의 단체전에도 참여했다.
어릴 적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운 도예, 평생 직업으로
백자의 아름다움 위해선 좋은 가마와 국산 소나무 중요
“난 촌부… 농사꾼이 열심히 농사짓듯 눈 뜨면 도예작업”
문경에서 8대째 도예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관음요의 김선식 대표는 장작가마에 쓰는 나무를 소나무만 고집한다. 그것도 국내산 소나무만 사용한다. 일본산 소나무 등을 사용해도 되지만 도자기를 구웠을 때 국산 소나무만큼 깊이 있는 색감과 영롱한 빛깔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란다.
“국산 소나무만 쓰다보니 가격부담이 크고, 이를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써왔고 사용량도 많아서 관음요에만 소나무를 대주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이 분 덕에 그나마 소나무 구하는 걱정은 덜었지요.”
그래서 그는 가마 뒤편에 마련된 장작보관창고에 장작이 가득 차 있을때 제일 행복하단다.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힘이 솟아나고 배가 부르니 밥을 안먹어도 배고픈 줄 모릅니다.”
김 대표는 도자 제작에 있어 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이른다고 말한다. 도예가마다 흙, 도자 성형 등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들이 약간씩 차이가 나는데, 그는 나무에 큰 비중을 둔다는 이야기다.
“좋은 가마에서 양질의 나무로 도자기를 구워야 도자기의 빛깔이 제대로 나옵니다. 국산 소나무만 고집하다보니 가마를 때는 연료비가 만만찮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고집해오던 것이니 제가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지요. 할아버지 때부터 백자를 많이 구웠는데, 백자의 영롱하면서도 깊이있는 색감을 내는 데는 국산 소나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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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관음요 도자기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선식 도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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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식 도예가는 장작보관창고에 나무가 가득하면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좋단다. 그가 장작보관창고에서 좋은 장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그는 가마도 전통 장작가마만을 고집한다. 가마도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 “전통가마라고 해도 가마를 만들 때 벽돌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가마는 직접 흙을 사서 제가 망뎅이(흙덩이)를 쌓아서 만들었습니다. 완성하는데 몇개월이나 걸렸지요.”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장에 들어섰을 때 방문자들을 먼저 반긴 것은 나무였다. 넓은 마당이 있는 작업장의 담장이 나무로 만들어졌다. 나무를 엮어서 예쁘게 담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나무둥치들을 수북이 쌓아 만든 담장이었다. 담장 너머로 커다란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보였다. 작업실 앞 마당에 자리한 소나무들은 족히 100년은 넘었을 정도로 크고 우람했다. 버섯지붕모양의 집과 소나무가 잘 어울려 마치 전원 속에 자리한 운치있는 식당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집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선 낯선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김 대표가 웃는 얼굴로 작업장에서 나와 손님들을 맞았다. “기대 이상으로 작업장이 이쁘고 운치가 있다”고 말하자 그는 소나무 자랑부터 한다. 그의 자랑을 굳이 듣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 수 있어 그의 말에 연방 고개를 끄덕이고 찬사를 쏟아냈다.
그는 어릴때부터 소나무와 인연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에 있는 작업장은 2000년에 지은 것이다. 이전에는 그 마을의 산속에 도예실을 있었다. 어릴적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도예를 시작한 그는 산 속 작업장에서 오랫동안 아버지와 도자기를 구웠다. 그곳에도 유독 소나무가 많았는데,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집과 작업실 주변에서도 소나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봐오던 것이 소나무이고, 소나무 숲에서 뛰놀며 자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도 도자기를 구워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아니 지금보다 더 힘들었다. 8남매의 막내인 그는 도자기를 가업으로 삼았던 아버지 때문에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 자랐다.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교도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실업고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이 도자기하는 것을 막았다. 자신처럼 그렇게 어렵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다른 직업을 갖고 자신만 가업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막내라서 늘 아버지를 따라다니고, 아버지가 특히 자신을 많이 사랑해주셨던 것이 도예의 길을 가게 된 동기가 됐다. 그의 아버지는 문경의 대표적 도예가 중 한명이었던 김복만 도예가(1934~2002)인데,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아버지라는 말을 자신있게 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가업을 잇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끝없는 육체적 노동에 늘 가난에 허덕이는 게 싫었지요. 대학까지 나온 아버지가 고등공민학교 교장을 하실 때만 해도 이렇게 가정형편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관두시고 30대 후반, 뒤늦게 가업을 잇겠다며 도예를 시작하면서 가정살림이 점점 쪼그라들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가출도 몇번 했다고 털어놨다. 그런 그에게 군복무가 도예를 달리 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아버지가 도자기를 굽고 어머니가 늘 뒷일을 거들어주셨지요. 눈 떠서 잠 들 때까지 도자기를 굽는데도 가정형편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이 드신 부모님이 그렇게 힘든 일을 하시는 게 가슴이 아팠습니다. 힘든 일을 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서 어른의 일을 거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그만 제 평생 직업이 돼 버렸지요.”
도자기를 굽는 일이 즐겁냐고 물었다. 취재를 가서 작가에게 물으면 대부분 “돈을 떠나 세상 무엇보다 작업이 재밌다” “작업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등의 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김 대표의 답은 기대를 완전히 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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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식 도예가의 작품. |
“그냥 눈만 뜨면 작업합니다. 예술작품을 만드니 행복하다,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겠다는 이런 생각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제가 도자기 만드는 것은 농사일과 같습니다. 농사꾼이 열심히 농사를 지을 따름이지, 올해 농사에서는 무슨 작물을 어떻게 키워 얼마나 생산해야지를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사가 농사꾼의 일상이듯이 이 일이 제 일상입니다. 열심히 만들 따름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는 단순히 열심히 만드는 데만 힘을 쏟진 않는다. 실험적인 시도, 즉 예술성을 살리려는 노력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로서의 창작열은 2개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한차례 초벌구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2~3차례 가마에서 굽고 황토를 도자기 표면에 손으로 발라 처리하는 관음댓잎 도자기를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또 선친으로부터 내려온 경면주사를 이용한 새로운 진사유약을 개발해 받은 특허도 있다. 특허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던 그는 “남과 같은 도자기는 결코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몇번이나 강조했다.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가마에 땔 장작이 중요하고, 장작을 잘 건조시켜 사용해야 한다. 이에 대한 획기적인 방법을 개발, 작업에 적용시킨 것도 그의 도예작업에서의 또다른 성과다. 보통 제대로 된 장작을 만들려면 10년 이상 말려야 하는데, 김 대표는 장작 말리는 시간을 줄이고, 장작을 좀더 잘 말려서 도자기의 빛깔 등을 더욱 아름답게 하도록 건조장비를 갖춰 건조시킨다. 이같은 여러가지 실험적 시도와 성공적 결과물 생산 등의 공을 인정받아 2005년에는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시골에서 농사일 열심히 하는 촌부라 불렀다. 눈 뜨면 밭으로 나가 일하고, 열심히 하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고, 하늘이 주신 대로 거두며 이것이 행복이라고생각하는 촌부 말이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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