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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에 기증한 정비파씨의 판화 ‘지리산’을 배경으로 투실한 포즈를 취한 손병열 사무국장의 ‘예술민주화’를 염원하는 눈빛이 더없이 형형하다. |
‘사무국장’이란 자리.
참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열심히 일해도 남는 게 ‘한숨’인 경우가 많다. 워낙 많은 경우의 수를 조율해야 하니 자연 여러 진영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기 십상이다.
세인들은 진보 성향의 예술단체는 좀처럼 ‘내홍’을 빚지 않을 걸로 안다. 아니다. 빚는다. 하지만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는다.
23년 역사를 가진 예술마당 ‘솔’.
‘있는 자만을 위한 예술’을 견제하면서 ‘없는 자의 예술’에 대한 거대담론을 양산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진보진영이 재차 ‘예술민주화’의 기치를 내건 것이다. 투쟁의 대상이 정치에서 ‘예술’로 건너갔다. 각계로부터 이목이 집중된다. 하지만 2005년 4월18일 일대 ‘파국’을 맞는다. 이날 총회에서는 의결권을 가진 정회원 19명이 찬반 투표를 해 16명의 찬성으로 단체 해산을 결정한다. 외형상으론 15년 전통의 예술마당 솔이 간판을 내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공화국으로 전이하고 있었다.
진보권이 타도할 대상이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젊은이의 욕구는 컬러풀했다. 자연히 회원 상당수는 시대와 상응하지 못하는 솔을 떠난다. 솔의 운영경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뜻으로 뭉친 솔이 돈 때문에 문을 닫는다니’.
그걸 치욕으로 여긴 일군의 인사가 총궐기한다. 지금은 순항이지만 그 격동의 순간을 손병열 사무국장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미술평론가 김영동씨, 문화기획가 박재욱씨, 정지창 영남대 교수 등 지역 시민문화예술계 인사 60여명이 예술마당 솔 정상화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합니다. 15년의 역사와 전통 속에 수천명의 회원이 거쳐간 시민문화예술단체를 이사장과 극소수 회원들의 의견으로 하루아침에 해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 것이죠.”
이젠 ‘민족’이란 단어도 매우 낯설다. 상당수 젊은이는 취업이 지상명령이다. 제도권과 비제도권, 보수와 진보의 경계도 거의 허물어졌다.
중구 서성네거리 근처 서문빌딩 4층 솔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얼굴 주름살이 벽에 걸린 정비파의 판화 ‘지리산’의 능선과 중첩되는 듯 했다.
문화예술 관련 예산을
예총과 산하단체 사업에 편중해 집행하지 말라
뮤지컬 전용극장 같은 하드웨어에 집착 말고
소프트웨어 중심의 문화발전도시 입안을
컬러풀축제에 쓸 돈이면 동네축제 100개 가능…
스마트폰 중독 청소년
고립된 도시생활자 위한 예술치유 프로그램 시급
대구가 공연중심도시? 관계자 중심서 못 벗어나
오페라·뮤지컬 도시도 다른 지역선 우습게 봐
◆ 없는 자를 위한 공간
-일전에 솔의 상징적 인물인 박재욱씨가 고인이 됐는데,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할 일도 많은데…. 그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어요. 솔이 그에겐 전부인 사람이었죠. 83년 기획실 판을 만들어 지역에서 전문 문화예술기획의 영역을 개척했어요.”
-솔 출범 당시 기득권층 지역 문화인들은 솔을 어떻게 봤나요. 상당히 삐딱하게 봤을 것 같은데요.
“1980년대 초만 해도 ‘공연민주화’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어요. 공연에 대한 인문학적 인식을 정확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어요. 의식 있는 공연은 거의 대학교 연극·탈춤 동아리 등이 주도했습니다. 공연을 하려면 시청문화예술과에 공연대본을 내고 가·불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문화는 자꾸 죽어가고, 남의 나라 문화가 득세를 하고 있으니 민족예술 함양 차원에서 제대로 된 공간과 모임체가 필요했습니다. 기대에 부응한 게 바로 솔입니다. 그런 예술적 집약체는 전국에서 처음이었습니다. 87~88년을 거치면서 많은 진보적 문화예술단체들이 성립되던 시기라 당국의 제재는 별로 없었습니다.”
-예산이 별로 없었을 텐데요.
“판화가 이철수, 정하수, 정비파 등이 개인전 등을 통해 도움을 주었습니다.”
-2005년 솔의 존폐위기가 어떤 형태로 다가왔습니까.
“1990년대 말부터 대표를 맡은 정재명 대표가 문화공간 G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이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솔을 강제로 해소하려 했던 과정에서 생긴 문제입니다. 초기 창립멤버들이 활동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던 탓이었죠. 나름대로 열심히 정 대표가 활동을 했지만 G를 중심으로 장을 이전하기 위하여 모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차세대 예술운동 강령이 필요한 때
-이젠 솔이 어떻게 해야죠.
“2005년 이후 기점으로 세계·사람·마음이 엄청나게 다분화됩니다. 사회·문화 지형도 엄청 바뀝니다. 문화복지 개념도 생겨나고, 지자체마다 각종 문화프로그램이 생겨나고 있어요. 문화예술 인프라가 과잉 상태입니다. 그런데 흐름은 일관되어 있지 못하고 혼돈스럽습니다. 솔은 그런 변화에 걸맞게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시민을 불러내지도 못했습니다. 세대 간 단절이 너무 심합니다. 솔이 중년문화만 대변한다는 느낌입니다. 솔은 앞으로 새로운 문화콘텐츠 개발 및 보급에도 매진해야 됩니다. 관(官)주도 문화정책에 대해서도 이슈화해야 합니다.”
-요즈음 대한민국 문화예술계를 어떻게 봅니까. 제도권 예술, 진보 예술로 나뉠 수 있다고 봅니까.
“모든 예술은 기본적으로 진보적이죠. 하지만 예술을 통한 예술 외의 활동이 보수적인 분도 많습니다. 제도권보다는 ‘주류예술계’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네요. 주류예술은 문화예술 권력에 가깝게 있어서 충분히 권력을 활용하고 시스템화시키며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이미 힘 있는 압력단체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합니다. 이들은 젊은 예술가, 독립 예술가, 복합예술 행위자, 생활예술 실천자 등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입니다. 솔은 태생적으로 전자보다 후자의 권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바야흐로 스마트폰 공화국입니다. 별의별 언설이 다 나오고 별의별 예술작품이 우후죽순이죠. 예술로 어떻게 유명해질까에 매몰된 상당수 예술가의 안목엔 민족예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많은 문화콘텐츠가 스마트폰 단말기를 통해 ‘개인적’으로 대량소비되다 보니 민족예술뿐 아니라 전반적인 예술이 규격화되고 상업화되어 재미(FUN) 위주로 제작됩니다. 즉, 돈이 되나 안 되나로 귀결되더군요. 자생적·창조적 문화예술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위기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 관행에 찌든 지역 예술계 맹공
-대구 예술행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평소 온화한 표정의 그도 이 대목에선 한숨을 내쉬며 ‘N분의 1’로 예술예산을 나눠먹는 주류예술계를 맹공했다)
“대구 KT & G 자리에 들어선 예술발전소를 절대 대구시에서 쥐고 있어선 안됩니다. 공무원은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고 있다면 실험적 젊은 예술가와 공감대를 더 형성해야 됩니다. 대구시의 경상 예산 속에 포함된 문화예술 관련 예산을 예총이나 산하단체 사업의 지원에 편중하지 말고 분리해서 다양하게 집행해야 합니다. 대구예술 발전의 중장기적인 로드맵을 짜고 거기에 맞도록 예산을 정책적으로 편성해야죠. 하드웨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우환미술관, 뮤지컬전용극장 등이 그 예입니다. 이젠 대구에도 예술공간이 꽤 많습니다. 하지만 상당수 공간은 객석점유율이 아주 낮아요. 놀고 있는 자생적 문화공간 또한 많은데, 그걸 네트워크를 통해 적극 활용해야죠. 대구시는 즉각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문화발전도시의 계획을 입안해야 됩니다. 당신들은 공무원이지 문화예술 전문가가 아니란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시립예술단 관계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시립예술단은 즉각 축소되어야 합니다. 예산을 엄청 많이 잡아먹고 있어요.”
-지역 예술인도 한계가 보이죠.
“모두 다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단지 행정예산에 지원도가 높아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예술활동이 위축되고 있는데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죠.”
-어떤 예술단체와 예술가에게 지원해야 된다고 봅니까.
“예술단체에 대한 직접 지원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예술활동에 대한 지원을 해야죠. 또한 예술가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현재 가장 절실한 예술프로그램은 뭐라고 봅니까.
“막대한 컬러풀축제 예산으로 100여개의 동네축제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동네(마을)축제는 문화예술 향유의 기본적인 태도와 분위기를 만듭니다. 문화발전도시의 비전을 이끌어내는 지난하고도 광범위한 참여과정을 만들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파편화되고 고립된 도시생활자나 스마트폰에 중독된 청소년을 위한 예술치유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대구가 공연중심도시로 가고 있는데, 과연 대구가 공연중심도시가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관계자 중심에서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공연중심도시라고 깃발만 꽂으면 되는 게 아니죠. 오페라, 뮤지컬 중심도시? 다른 지역에서 이걸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는 데만 수십년이 걸리는 게 예술중심도시입니다. 제발 행정으로 예술이벤트를 하지 마세요.”
◆ 지역 언론도 정신 차려야
-솔과 민예총도 관계자 중심이고, 주류예술을 일부러 멀리하지 않는가요.
“주류 측에 함께 하자고 제안을 해도 그들의 마인드가 친서민적이지 못하다 보니 결국 우리끼리 일을 하게 됩니다. 주류예술 쪽은 친자본적입니다. 전시하고 파는 것에 치중하는 게 주류의 흐름입니다. 독립예술·생활예술가는 팔리는 데 목숨을 걸지는 않죠. 솔과 민예총은 그들을 활성화하는 데 더 주력해야 될 겁니다.”
-예술, 예술가란 뭐죠.
“너무 신비하게 보지 맙시다. 예술은 삶에 기반한 소통의 과정일 뿐입니다. 공감하고 동의하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예술가는 사람 마음과 환경을 관찰하고 자신을 성찰,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을 이루어내는 사람이죠.”
-지역 언론에 한마디 한다면.
“ 공연 관련 기사를 보면 너무 유명인·서울 편향적입니다. 광고주에 너무 휘둘리고 있어요. 특히 ‘오페라의 유령’ 등 서울발 매머드 작품이 내려오면 덮어놓고 그걸 안 보면 촌사람 되는 것처럼 몰고 갑니다. 지역지가 살려면 토착 로컬 예술과 예술가에 더 애정을 가져야죠.”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손병열
1963년 경남 합천 출생. 경북대 농화학과 졸업. 82년 경북대 극예술연구회에서 문화예술 활동 시작. 극단 ‘진달래’와 놀이패 ‘탈’ 합쳐 90년 극단 ‘함께 사는 세상’ 결성. 예술마당 ‘솔’ 창립멤버로 2010년부터 2년간 공동대표 역임. 2012년 마당극 ‘장사하자’ 대본·연출. 20여년째 인물사진 촬영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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