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의 대표적 호국 성지 ‘부인사’와 ‘중암암’을 가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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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5-23   |  발행일 2014-05-23 제34면   |  수정 2014-05-23
고려땐 ‘동화사보다 부인사’…초조대장경 소장역사만으로도 위상 입증
팔공산의 대표적 호국 성지 ‘부인사’와 ‘중암암’을 가다
중창불사된 부인사. 부인사는 한때 2천여명의 승려가 수행했던 큰 가람이었다.
팔공산의 대표적 호국 성지 ‘부인사’와 ‘중암암’을 가다
부인사 동편 밭에 방치된 수조. 돌로 만든 수조는 물을 저장해두던 곳이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렸던 2011년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판각 1천년이 되던 해였다. 초조대장경은 1011년(고려 현종2년 음력 2월)에 처음 판각돼 총 76년에 걸쳐 6천여권의 분량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이다. 그래서 ‘초조(初雕)’라는 용어를 쓴다. 초조대장경은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염원으로 조성됐다. 중국 북송의 개보칙판대장경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이며, 재조(再雕)대장경인 팔만대장경보다 222년 앞섰다.

초조대장경은 처음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됐다가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졌다. 왜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졌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문헌이나 기록은 없으나 팔공산이 좀 더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 1237년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 제25권 대장각판 군신기고문(大藏刻版 君臣祈告文)에 ‘심하도다. 몽고가 환란을 만듦이여. 그들의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 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아주 어두움도 또한 짐승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공경하는 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을 알겠나이까. 그리하여 그 더러운 발이 지나가는 곳에 불상과 경전을 불살라버렸습니다. 이에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쓸 듯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아, 여러 해를 두고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돼버렸으니…’라고 나와 있어 초조대장경이 부인사에 보관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초조대장경이 부인사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려시대 부인사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왕건이 공산 동수에서 패한 뒤 동화사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며 “당시 부인사가 동화사보다 훨씬 큰 사찰이었다”고 말했다.

초조대장경이 소실된 역사적 배경에는 1231~59년 6차례에 걸친 몽고의 고려 침략이 있다. 이 가운데 2차와 6차 침입 때 대구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초조대장경 목판본이 불에 탄 해는 2차 침입(1232) 때다. 몽고 살리타의 주력군이 북계에 주둔할 동안 그 일부가 영남지역까지 내려와 약탈과 방화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초조대장경 인쇄본이 일본 교토 난젠지(남선사) 등지에 2천500여권, 국내에 250여권이 남아있다. 고려대장경연구소가 2004년부터 6년간에 걸쳐 전산화(DB)를 완료하고 2010년부터 초조대장경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올해까지 6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총 6천120권을 복간해 동화사와 일본 난젠지, 고려대장경연구소에 소장시킬 예정이다.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 사무처장은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인 종림 스님이 그동안 사라졌다고만 믿었던 초조대장경을 찾아 전산화작업을 거치면서 초조대장경이 주목받게 됐다”면서 “우리나라 초조대장경은 천년의 문화유산으로, 당시 고려의 인쇄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알려주는 명품 대장경”이라고 말했다.

한편, 몽고의 6차 침입은 차라다이가 이끌었다. 몽고의 주력부대가 충주와 상주에서 패퇴한 뒤 수천명의 몽고군이 대구를 비롯한 영남 일대를 노략질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1255년 3월, 산성과 섬에 들어가 지키던 자들을 모두 나오게 할 때 공산성에 들어간 백성 가운데 굶어죽은 자가 무리를 이뤘다. 노약자는 계곡을 채우고 어린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떠나는 자도 있었다’고 나와 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 또한 빈번했다. 대구가 왜구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1375년, 1382년, 1838년 등 3차례였다.



#지난 15일 팔공산 부인사에 들렀다. 1987년부터 시작된 중창불사로 명부전밖에 없던 사찰이 대규모로 중창됐다. 하지만 선덕여왕과 초조대장경, 공산회맹 등 부인사가 호국 사찰로 자리매김했음에도 고찰의 흔적으로 남겨진 당간지주와 수조(水槽) 등이 인근 과수원과 포도밭에 방치돼 있다. 이는 부인사 옛 터가 지금보다 훨씬 밑에 있었음을 방증한다.

김정학 국악방송 방송제작부장은 “경북대와 대구대 발굴팀이 세 차례 지표조사와 발굴을 했지만 탄층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표면에서 90~100㎝만 발굴했기 때문”이라며 부인사가 사적지로 지정돼 대장각터에 대한 재발굴이 안정적으로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또 “만약 부인사에서 탄층이 발견된다면 대구가 일약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부인사에서 안내를 맡은 김규덕 문화유산해설사는 “역사드라마 선덕여왕과 무신 등에서 부인사와 관련한 장면이 나와 관광객이 한때 급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숭모전 문을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아 선덕여왕 어진을 보러 온 관광객이 실망을 안고 되돌아간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는 또 “초조대장경 인쇄본도 부인사 삼광루에 금강반야바라밀경과 어제비장전변상도에 각 1점만 있을 뿐 복원된 초조대장경은 동화사 선박물관에 있다”며 “문화재란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가치가 있는데 초조대장경을 원래 있던 부인사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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