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2] 이두석과 왜관청년동지회 사건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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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25   |  발행일 2014-07-25 제11면   |  수정 2014-11-21
일제에 맞선 조선청년 ‘드높은 의기’로 민족정신 지켰네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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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석과 그의 아버지 이수목의 왜관읍 매원리 생가. 현재 생가 원형은 많이 사라졌고 일부 가옥과 대문, 마당, 주춧돌 등이 남아있다.

◇ 스토리 브리핑

‘왜관청년동지회 사건’은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4월 무렵, 칠곡 왜관읍에서 농촌 청년을 대상으로 시작된 항일 계몽운동이다. 1938년 2월까지 그 맥을 이어왔다. 왜관청년동지회는 당시 이 지역 출신이었던 인제 이두석(仁濟 李斗錫, 1902~38)과 동향이었던 정행돈(鄭行敦), 이창기(李昌基), 박몽득(朴夢得)이 주도해 결성됐다. 이두석은 독립운동가 이수목의 장남이기도 했다. 동지회는 야학을 열어 청년들에게 글과 산술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 왜관은 경부선 개통과 더불어 급성장한 신흥 상업도시였지만, 작은 면 단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는 대형규모에 속했다. 핵심인물이었던 이두석을 중심으로 ‘왜관청년동지회 사건’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1. 대를 잇다-독립운동가 이수목의 아들

이수목(李壽穆, 1890~1948)의 눈에 결기가 서렸다. 아직 마흔둘, 가시밭 같은 자신의 길에 새로운 동지가 생긴 참이었다. 그 동지란 바로 자신의 장남, 이두석이었다. 맏아들이 이끄는 왜관청년동지회가 한바탕 파란을 몰고 올 기세였다.

아버지 이수목은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에서 태어났다. 정의감이 남달랐던 이수목은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던 1915년 2월28일,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安逸庵)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를 결성했다. 정월 대보름 시회(詩會, 시인이나 시 애호가들의 모임)로 위장해 일제의 눈길을 피했다. 당시 이수목은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에게 제사를 드리고 국권회복을 위해 싸울 것을 맹세했다. 이후 그는 조직의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담당했다.

여운형(呂運亨), 조동호(趙東祜) 등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했던 1944년 8월10일에는 중앙의 재무 담당으로 자금조달 관리를 맡았다. 여운형 암살사건 이후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칩거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칠곡 왜관은 항일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죽음도 불사하며 조국 독립과 민족을 위해 청년의 붉은 피를 바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 기운이 지금도 지역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특히 왜관지역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은 경북의 유교적 전통이 시대적 배경으로 크게 작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유교적 전통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비밀결사운동이 꾸준히 이어졌고, 파리장서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또한 1940년대 대구 지역 학생운동의 배경과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곳이 왜관이었다.

그런 고장에서 자신의 아들, 이두석이 절박하게 외치고 있었다.

‘오늘 같은 교육제도는 모두가 일본인 위주이며 조선민족의 정신을 소멸시킬 뿐이다.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을 위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 또한 산업·경제·문화정책을 보면 모두가 일본인 위주이니, 우리 조선인을 이롭게 하는 바가 하나도 없다.’

이수목은 민족말살 정책을 추구해온 일제에 맞서, 배일사상을 분출시키는 맏아들이 자랑스러웠다. 하여 다짐했다. 지금부터 아들을 도울 것이다. 아들 이두석에겐 천군만마였다.


#2. 청년을 일으키다-왜관청년동지회

이두석은 몸부림쳤다. 아직 솜털마저 보송보송한 보통학교 학생이었지만 영민한 아이였다. 알 것은 다 알고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보고 겪은 것이 모두 일제의 그늘 아래에 있었다. 민족적 차별대우와 멸시가 가슴에 피멍으로 맺힌 터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었고 어렵고 힘겨운 시기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두석은 곧장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3·1 선언 직후였다. 그러던 중 1929년 11월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국내 최대규모의 독립운동으로 기록된 거국적인 사건이었다. 청년 이두석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책을 밀쳐내고 서울에서 연대 시위에 나섰다.

‘조선청년학생 대중이여, 궐기하라!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항적 투쟁으로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고 성원하라!’

시위에 나선 이두석은 거침없었다. 맺히고 응어리진 한(恨)은 가슴에서 솟구쳐 입밖으로 터져나왔다. 일제의 부당함을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럴수록 일경의 감시는 혹독하고 날카로웠다.

결국 이두석은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당했고, 종로경찰서에서 29일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동시에 강제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이도 저도 못하고 가슴속에 깊은 한(恨)만 품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두석은 치밀어 오르는 배일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외면도 체념도 불가능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하여 1932년 4월, 고향 왜관에서 청년동지회를 결성했다. 동향이었던 정행돈·이창기· 박몽득 등이 뜻을 같이했다. 정행돈과 이창기 역시 이두석과 같은 처지였다. 그들은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일본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업을 주도하다 퇴학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이두석은 청년동지회를 중심으로 농촌계몽과 소비조합 운동, 한글 강습에 나섰다.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였다. 뜻을 같이하겠다는 고향 청년들이 줄을 이었고 힘을 실어주었다. 아버지 이수목은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날도 이두석은 밤 시간을 이용해 청년들에게 한글과 산술을 가르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있었기에 어렵기는 해도 힘들지 않았다. 모국어를 잃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었다. 말과 글이 없으면 민족의식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이두석은 곧 있을 소비조합 회의에서 발언할 내용을 궁리하며 집으로 향했다. 달빛마저 사위어 든 칠흑같은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검은 그림자가 스멀거렸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두석은 개의치 않았다. 일경은 여전히 24시간 그를 감시하고 미행하고 있었다.

결국 다음날 이두석은 현장에서 일제 경찰에게 걸려들고 말았다. 모임에 참석했던 수많은 조직원이 연행되고 구속됐다. 이두석은 투옥되었고, 가혹한 고문이 그의 몸을 짓눌렀다. 그에겐 숨을 고르고 힘을 키울 시간이 필요했다.

‘일본으로 가자. 더 배우고 더 알아야 한다.’

풀려난 이두석은 얼마후 일본으로 향했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는 존재였다. 깊이, 넓이, 부피, 그 무엇 하나 가늠할 수 없고, 인간이 감히 간섭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으로 가는 배 난간에서 이두석은 그렇게 뜻을 다시 세웠다. 어떻게든 흘러가리라.

1932년 늦은 봄, 이두석은 일본의 야마구치 중학을 거쳐 곧바로 도교 중앙대학 법과로 진학했다. 당시 조선 유학생 사회의 사상적 동향은 민족해방운동을 지향하고 있었다. ‘일본’이라는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의 독립운동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화두였다. 이른바 아나키스트(Anarchist) 지하운동이었다. 누구보다도 민족주의 사상이 강렬했던 이두석 또한 적극적으로 암약했다. 그러다가 1937년 일경에 체포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두석은 1938년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봄 귀국했다.


#3. 옥에서 눈을 감다-대구경찰서의 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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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 세워져 있는 독립유공자이두석선생추모비. ‘왜관청년동지회’를 결성해 항일 계몽운동을 주도한 이두석의 결연한 의기가 느껴진다.

고향으로 돌아 온 이두석은 가슴이 뛰었다. 뿌리째 뽑혀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왜관청년동지회의 맥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폭풍이 거세게 불어닥쳐야 했다.

‘망국의 치욕을 씻고 독립을 회복하는 길은 역시 하나뿐이다. 오직 민중에 대한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사상과 독립정신을 각인시켜야 한다.’

계몽운동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한 이두석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우선 독서회 성진회(惺進會)를 발족했다. 박형동(朴亨東), 윤억병(尹億炳), 이석(李錫) 등 젊은 청년지사 수십 명이 함께했다. 독서회인 만큼 ‘조선어학’ ‘조선역사’ ‘조선문학’ ‘일반사회 사상학’ 등을 강론했다. 회원들과 더불어 발표와 토론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양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동시에 일경의 감시와 주목을 피하기 위해 모임은 친목계처럼, 회합장소는 마치 고찰탐방(古刹探訪)인 것처럼 위장하고 활동했다.

또한 농민운동의 일환으로 형평사(衡平社)운동에도 나섰다. 형평사란 1923년 처음 조직된 단체로 진주의 백정들이 인권을 찾기 위해 시작한 계급해방운동이었다. 이두석의 열심에 원근의 농민들과 문중의 노복들은 ‘인제 선생님, 인제 선생님’하며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하지만 언제까지 일경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1938년 2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주 양동으로 갔다가 검거되고 말았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자백을 받아내려는 일경의 회유와 고문은 집요하고 모질었다. 하지만 이두석은 동요하지 않았고 꿋꿋하게 버텼다. 그러던 옥중 투쟁 한 달 만인 3월23일, 냉기와 살기만이 가득차 있던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함께 체포되었던 이창기와 정행돈은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다 1941년 3월 석방됐다.

정부는 1977년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서훈했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추모비는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 건립되어 있다. 낙동강이 바로 앞으로 내려다보이고 구름도 슬쩍 비켜 지나가는 양지바른 자고산 언덕이다.

이두석과 그의 아버지 이수목의 생가는 왜관읍 매원리에 남아있다. ‘3천평 만석집’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생가 원형은 많이 사라지고 없다. 일부 가옥과 대문, 마당, 주춧돌 등으로 그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글=김진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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