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12> 천생산과 홍의장군 곽재우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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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5   |  발행일 2014-09-15 제13면   |  수정 2021-06-15 17:55
물 대신 쌀로 말 씻는 시늉에 속아넘어간 왜장은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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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산 미득암에는 홍의장군 곽재우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왜군이 산기슭에 큰 못을 만들어 천생산의 지하수를 끌어모아 천생산성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의병들이 식수난에 시달렸다. 이에 홍의장군 곽재우가 미득암에 백마를 세워두고 쌀을 부어 말을 씻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왜군은 산성에 아직 물이 많은 것으로 착각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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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가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는 천생산성. 천생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이 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꼽히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홍의장군 곽재우도 이 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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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서 칠곡 가산면에 걸친
낙동강 향해 우뚝 선 명산
겸재 정선 그림으로 남기기도

사방이 절벽인 천혜의 요새
신라 박혁거세가 쌓은 산성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1. 구미에서 가장 먼저 달뜨는 산

구미시에서 동쪽을 보면 낙동강 건너 아주 특이한 산이 눈에 들어온다. 여느 산들이 울멍줄멍한 능선을 드러내고 있는 데 비해 유독 이 산만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솟은 데다 산정이 마치 함지박을 엎어놓은 듯 수평을 이루고 있다. 천생산(天生山)이다. 구미시 신동과 황상동, 그리고 칠곡군 가산면에 걸쳐 있다. 해발 407m로 그리 높지 않으나 낙동강을 내려다보고 우뚝 서 있어서 그 위용이 대단해 인근에서는 명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구미시민들은 이 산을 늘 바라보면서 일상생활을 할 정도로 낙동강 위로 솟은 천생산의 조망은 멋지다. 특히 이 산정 위로 달이 뜨는 광경을 환상적인 풍경으로 꼽기도 한다.

특출한 산 모양과 깎아지른 절벽의 경관으로 인해 예부터 찾는 이가 많았다. 조선조 말의 유명한 진경산수 화가 겸재 정선도 찾아와 그림으로 남겼을 정도다. 그의 천생산성 그림은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의 정상이 한 일자를 그어놓은 듯하고, 그 아래 절벽이 깊게 파여 흡사 하늘 천(天)자처럼 생긴 데다, 사방이 절벽을 이루고 있어서 천혜의 요새로 봐 천생이란 이름이 붙은 듯하다.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아서 ‘반티이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2. 박혁거세가 산성을 구축하다

이 천혜의 요새를 먼저 알아본 이는 신라라는 국가를 처음 연 박혁거세였다. 세종실록지리지와 경상도지리지 산성조에 이 산의 동북 면에 박혁거세가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박혁거세는 기원전 57년 서라벌의 알천 언덕에서 화합을 가진 여섯 촌장의 추대로 신라 초대 왕이 됐다. 부족국가로 나뉘어 있던 신라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을 이루면서 최초의 임금이 된 그는 명실공히 나라를 온전히 하나의 체제로 묶는 게 급선무라 여겼다. 갖가지 개혁정책이 입안됐으며 나라의 문물을 정비했다. 아울러 각 지역의 지리를 파악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힘썼다. 국토를 직접 순시하면서 정비할 곳을 정비하고, 허술한 곳은 성을 쌓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군!”

그가 이 지역을 순시할 때 제일 먼저 터트린 감탄이었다. 너른 들판 사이로 큰 강이 흐르는 가운데 강 건너 우뚝 솟은 산이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장쾌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강을 건너 산을 올랐다.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보니 갑자기 사방이 툭 트이면서 하늘 위에라도 선 듯 깎아지른 절벽의 아슬아슬한 높이가 실감됐다.

“이 산이야말로 국방상 중요한 요새가 될 만하지 않은가?”

그는 산 곳곳을 둘러보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 지역은 당시 신라의 변방지역이었다. 강의 동편인 도개지역이 초기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이어서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이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이곳은 국방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 산에 성을 축조하라!”고 그는 명령을 내렸다.

산성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됐다. 혁거세라는 걸출한 영웅은 통일된 국가의 기반을 닦는 가장 중요한 게 국방을 튼튼히 하는 일임을 무엇보다 먼저 간파했고, 그에 따라 국토 요소요소에 산성을 구축하여 신라의 강역을 튼튼하게 지키려 했다. 그런 가운데 낙동강을 사이에 둔 천생산과 금오산의 국방적 가치를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한 것이다. 이들 산성은 통일신라와 고구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그 중요성이 증대됐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산성은 ‘둘레가 324보, 성안 넓이가 5결(結)이며, 우물이 하나, 작은 못이 두 개’ 있었다. 그리고 ‘산성의 과반이 천연의 절험’이라 했다. 성문과 방탄석, 당간지주와 군기를 꽂았던 자리 등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비변사에서 산성수축의 계청을 올림에 따라 전국의 산성을 수축하고 재정비할 때 영의정 류성룡은 천생산성도 금오산성과 함께 수축할 것을 당시 충청·전라·경상좌우도의 도체찰사를 맡고 있던 이원익에게 하명했다. 이원익은 인동현감 이보에게 이 일을 맡겼다.

이어 경상감사 이시발과 찰리사 곽재우 등이 계속해서 이 성을 수축해나갔다. 이보는 선조 26년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다가 관찰사 이시발에게 발탁, 인동현감 때인 정유재란 때에는 이 성에 들어와 항전을 했다. 홍의장군 곽재우의 천생산성 항전은 유명하다.



#3. 홍의장군 기지로 왜적을 물리치다

천생산성은 강 서쪽의 금오산성과 함께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군사적인 요충지로 중요시됐다. 특히 부산을 출발, 대구를 거쳐 칠곡과 구미지역의 낙동강안을 따라 상주로 이어진 영남대로(또는 중로)의 길목에 있기 때문에 그 군사적인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영남대로와 낙동강을 통해 서울로 진격하던 왜적들은 그런 만큼 이 성들이 눈엣가시였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한때 이 성에서 왜적과 대치했다.

왜군들이 낙동강을 따라 파죽지세로 올라오고 있을 때였다. 홍의장군은 성내에 진을 치고 수시로 산을 내려가 강안에 출몰하며 왜군들을 괴롭혔다. 왜군들은 이에 홍의장군 부대의 본거지인 천생산성을 괴멸하지 않으면 북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리라 생각했다.

“천생산성을 함락해서 그걸 딛고 북진하자.”

왜군들은 산성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사방이 절벽으로 깎아놓은 것 같은 요새 중의 요새라 공략하기가 어려웠다. 가파른 산을 기어올라, 바위틈이 있는 곳은 물론 동쪽의 비탈을 줄곧 타면서 공략했다. 그러나 난공불락이었다. 왜장은 부하들을 재촉하고 독려했으나, 맹렬하게 저항하는 의병들에 번번이 밀려 내려올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왜군들은 초조해졌다.

‘저 성을 어떻게 무너뜨리지?’라고 왜장은 곰곰이 생각했다. 무엇보다 성안의 정보가 필요했다.

“이곳의 지리에 밝은 노인을 잡아오라”고 왜장은 지시했다. 한 노인이 잡혀왔다. 왜장은 물었다.

“노인, 저 산에서 가장 귀한 게 무엇이오?”

“당연히 물이지요.”

“물이라고? 그렇겠지. 저렇듯 험하고 바위로 둘러싸인 곳이니 물이 귀할 수밖에 없겠지.”

왜장은 급히 산기슭에다 큰 못을 파게 했다.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산속의 지하수들이 못으로 모여드는 게다. 이렇게 되니 성안에 우물과 연못의 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300~400명의 의병은 물론 군마가 쓸 물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연못이 바닥을 드러내자 의병들은 심각한 식수난에 시달렸다. 말의 오줌으로 목을 축이는 일이 생겨났다.

“큰일 났군. 사방이 왜놈천지니, 산 아래서 물을 공급할 길도 끊겼고, 낭패가 아닌가?”

홍의장군은 머리를 쥐어짰다.

“그래, 적들은 아직 우리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으니, 눈속임을 할 수밖에 없군.”

홍의장군은 병졸들에게 백마 세 필을 돌출한 바위 끝에다 세우게 했다. 그리고는 흰쌀을 말 등에다 줄줄 부으면서 말을 씻는 척했다. 왜군들은 이제 산성에 물이 떨어져 항복을 하겠거니 하고 기다렸는데 웬걸 멀리 올려다보니 말을 씻기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세 필이나 말이다. 석양빛을 받은 흰 쌀은 말의 목덜미에 들어붓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는 듯했다.

“이런, 물이 귀하다는 말은 헛말이었군.”

왜장은 탄식을 했다. 퇴각을 명했다. 그러나 퇴각하는 왜군을 가만 놔둘 홍의장군이 아니었다. “밧줄을 끊어라!”하고 호령했다. 칡넝쿨로 묶어 달아놓은 돌들이 일제히 아래로 굴러 내렸다. 왜군들은 바위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이로 인해 이 바위를 미득암이라 불렀는데, 또는 쌀의 덕을 봤다고 해서 미덕암(米德岩)이라 부르기도 했다. 천생산의 서쪽 석벽 끝 벼랑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바위다. 구평동 쪽에서 보면 큰 사자가 포효하는 듯하다.



#4. 힘 북돋우는 샘물 이야기

임진왜란 전에 이 산성 안에는 만지암이라는 절이 있었다. 절의 앞뜰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에선 신기하게도 늘 김이 솟아났다.

이 바위와 얽힌 조선 중종 때 송당(松堂) 박영(朴英)과의 전설이 전해온다.

박영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다. 기질이 호탕하여 거침이 없었다. 힘도 장사였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 의주목사, 경상좌병사, 병조참판지중추부사 등 관직도 순탄하게 뻗어나갔다. 그러나 세자인 연산군의 성질이 포악한 것이 우려되어 낙향을 하고 말았다. 낙향 후 그는 오직 책과의 씨름만을 일삼았다. 정붕(鄭鵬)의 문하에 들어 마침내 거유가 되었다. 나중에 문목이란 시호를 하사받고, 금오서원에 향사되었다.

송당이 이 절에서 공부할 때였다. 밤이면 으슥한 절 뒤뜰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그머니 뒤뜰로 가보니 승려 둘이서 바위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가지로 바위 아래의 샘물을 떠 마시고는 큰 바위로 샘을 덮어놓았다. 그러니까 거기에 샘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승려들이 각자의 방으로 사라지자, 박영은 바위에 다가갔다.

큰 돌을 덮어놓은 곳에서 돌을 흔들어보니 꿈쩍도 않았다. 그러나 박영은 장사였다. 힘껏 바위를 들어내고는 바가지로 물을 떠마셨다. 시원하고 단 맛이 나는 좋은 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힘이 불끈하고 솟는 느낌이 들었다. 돌을 들어보니 의외로 아까보다는 가볍게 들렸다. 마시면 힘이 세지는 신비한 물이었다.

“아하, 이 물에 비밀이 있었구나.”

박영은 샘을 덮어놓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밤이면 밤마다 같은 시간만 되면 승려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것이었다. 박영은 그들의 태도가 미덥지 않았다.

“이놈들이 힘이 세지면 무슨 역적모의를 벌이지 않을지 염려가 되는군.”

박영은 결국 무쇠를 녹여서 그 바위를 통째로 덮어버렸다. 그러자 얼마 못 가 그 절도 망해 승려들은 떠나버렸다. 그 후 그 바위 밑에서는 겨울이면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여름이면 찬바람이 난다고 했다. 때로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달그락달그락하는 바가지 소리가 들리기도 한단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영남일보DB
공동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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