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자연지리 보고서 대구GEO] 대구 봉수지 히스토리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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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1-28   |  발행일 2014-11-28 제36면   |  수정 2014-11-28
“장군, 횃불이 3개 올랐사옵니다”…“적군이 국경에 가까이 왔구나!”
[인문·자연지리 보고서 대구GEO] 대구 봉수지 히스토리
대구시 수성구 법이산에 위치한 법이산 봉수터.
[인문·자연지리 보고서 대구GEO] 대구 봉수지 히스토리
대구시 수성구 성동에 있는 성산 봉수터. 봉수터는 밭으로 변했다.
[인문·자연지리 보고서 대구GEO] 대구 봉수지 히스토리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에 있는 소산 봉수.


“변방 성의 잦은 북소리 긴 어둠을 경계시키는데

봄눈이 자주 내려 해변의 입구는 어두컴컴할 것입니다.

지난밤에도 산 남쪽에 급히 봉화가 올랐는데 늙은 병사는 지는 해의 황혼구름 바라보며 눈물 흘립니다.”

이 시는 1596년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사명대사 유정이 팔공산 공산성에서 공산성을 방문한 도체찰사 서애 류성룡에게 지어 올린 시다.

이 시 가운데 셋째 수 ‘昨夜山陽烽火急’에 ‘봉화’가 언급된다. 구본욱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 자문위원은 “여기서 산양(山陽)이라고 한 지명은 ‘산의 남쪽’을 의미하는데 팔공산에서 본 남쪽이라면 앞산이나 법이산 등을 가리킨다. 법이산에 봉화 유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 ‘산양’은 법이산 봉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봉화는 임란 당시 대구에서 운용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나라의 봉수(烽燧), 즉 봉화는 문헌상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봉수는 고려 말에서 조선초에 체계화됐다. 봉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는데 봉현(烽峴), 봉산성(烽山城), 봉상왕(烽上王) 등의 용어로 확인된다. 이후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연행기사, 만기요람, 홍재전서, 임하필기, 연려실기술 등 고서와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지리서에 봉수가 여러 차례 언급되거나 표시되고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 봉수에 관한 기록이 173군데나 나타난다.

옛 기록을 종합하면 현재 남한과 북한에는 약 1천200개의 봉수가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가운데 650여개가 북한에 있을 것으로 본다. 경상도 지역에는 경남이 81개소, 경북이 133개소로 나타났지만 최근 조사에 따르면 경북이 150여개로 늘어난 상태다. 상대적으로 경북이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경주(9), 의성(6), 상주(6), 영천(5) 등의 순이다. 이 가운데 대구는 현재 5개로 나타난다.

영조 때 편찬한 대구읍지에는 마천산(馬川山) 봉수, 법이산(法伊山) 봉수, 화원 성산(城山) 봉수가 소개되고 있다. 고성토성에 있던 고산(孤山) 봉수는 경산에서 수성구 성동으로 바뀌어 대구에 편입됐다. 또 90년대 달성이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현풍 소이산(소산 또는 쌍산) 봉수 역시 대구시역에 있다.

대구읍지에는 마천산 봉수에 대해 ‘대구부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하북면(河北面)에 있다. 남쪽으로 화원의 성산 봉수에 응하며, 북쪽으로 성주목의 각산봉에 알려주니 거리가 30리’라고 쓰여 있으며 성산 봉수에 대해선 ‘부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화원면에 있다. 서쪽으로 성주목의 덕산봉에 응하며 북쪽으로 하북면의 마천산봉에 알려주니 거리가 20리’라고 돼 있다.

성주출신 생원 윤종대가 18세기에 지은 시 영벽정(映碧亭) 8경 중 제7경에 ‘봉화평안이백년(烽火平安二百年·봉화가 200년간 평화로웠다)’이란 시가 전해온다. 영벽정은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에 있는 정자로 이 봉화는 마천산 봉수를 일컫는다. 화원의 성산봉수 위치는 현재 화원유원지 정상부 팔각정 일대일 것으로 본다.

한편 법이산(法伊山)은 부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수동면에 있고, 남쪽으로 청도의 팔조령봉에 응하며, 북쪽으로 경산(慶山)현의 성산(城山)봉에 알려주니 거리가 20리’라고 했다. 대구읍지에 법이산은 조족산(鳥足山) 즉 ‘새의 발’을 닮은 산으로 나오는데 법이산은 팔조령에서 흘러내리고 부의 동쪽 20리쯤에 위치하며 봉수대와 기우단이 있다고 돼 있다. 기우단의 위치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법이산 봉수터는 수성호텔 인공폭포 뒤에서 동쪽 용지봉 쪽으로 약 30분만 올라가면 나온다. 봉수터로 추정되는 북동쪽 구릉에 석축의 일부가 남아있다. 봉수지는 길쭉한 편으로 안내판에 따르면 둘레가 약 50m다. 봉수지 가운데 돌과 시멘트를 섞어 만든 작은 제단이 있고, 그 위에 횃불 모양을 한 조잡한 화강석 조형물이 있다. 100년 가까이 방치된 것을 1982년에 복원했다고 하나 어설프기 짝이 없다. 봉수지 안내판의 글자는 풍상에 훼손돼 잘 보이지 않는다. 내용도 오류 투성이다. 경산의 성산봉에 정보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데 현재 성산봉은 수성구 성동 46-2로 수성구에 속해 있다. 성산봉은 고산토성 정상부(해발 95.3m)다. 법이산 봉수터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운동기구가 설치된 장소가 나오는데 일부에선 이곳이 옛 봉수지였던 곳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발굴조사와 제대로 된 복원이 필요할 듯하다.

삼국시대 고대토성인 고산토성 내 성산봉수는 수성구 성동 뒷산에 있다. 성산 봉수는 경산시 하양읍에 있는 시산봉수와 연결된다. 성동은 인천채씨 집성촌이다. 토성 북쪽에 퇴계 이황과 우복 정경세를 기리는 고산서당이 있으며 남쪽에 삼국시대 토성의 흔적이 있다. 남쪽 정상부에 봉수대 터가 있는데 현재 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누군가 작은 돌무지를 만들었는데 봉수지 터로 추정해 누군가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정상부 남쪽에 오래된 우물이 있다. 고산은 나지막하지만 사방팔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곳이다. 고산서당과 봉수터 삼국시대 토성을 연결하면 멋진 역사유적관광지가 될 터인데 고산서당을 제외하곤 안내판도 없이 방치됐다. 이 지역은 현재 개발제한구역이다.

고산서당의 김하길 문화유산해설사는 “임란 때 이여송의 지리참모였던 두사충이 말년에 고산에 묻히고자 할 만큼 명당이었다”며 “금호강 둑이 생기기 전 고산 북쪽 벼랑까지 강물이 들어차 수려한 경관을 자랑했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봉수’는

봉수 또는 봉화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통신망이자 국가방위수단이었다. 북방과 일본 등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한양도성에 소식을 알렸다. 국경선에 인접한 연변봉수와 영토 내 내지봉수로 나뉜다. 중국과 일본에도 봉수는 있으나 우리나라와 같이 꼼꼼하게 관리하지 않았으며 촘촘하게 위치하지도 않았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봉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을 갖고 있다. 조선의 봉수제도는 1865년에 완전 폐지됐다. 봉수는 낮엔 연기로 밤엔 횃불로 신호를 했다.

봉수전문가 LH공사 김주홍 박사는 “한반도 북쪽엔 3개의 루트, 남쪽엔 2개의 루트가 한양까지 연결됐다”며 “남해안 다대포나 여수에서 아침에 봉수를 올리면 해지기 전 한양까지 당도해야 했다”고 말했다. 비가 오는 등 날씨가 궂을 때도 매일 깃발이나 꽹과리, 사람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연락을 취해야 했다. 봉수가 굳이 높은 산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김 박사는 “지리산, 태백산, 한라산 등 높은 산에는 봉수를 설치하지 않았다”며 “최대한 빨리 도성에 소식을 전하는 게 중요한 만큼 낮은 산이나 구릉 등 시야확보가 가장 좋은 곳에 봉수를 설치했다”고 말했다.

봉수의 신호는 주로 연기와 횃불을 이용했다. 횃불과 연기가 하나이면 평안화 즉 평상시요, 둘이면 적이 나타났다는 신호다. 셋이면 적이 국경에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넷이면 국경을 침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횃불이 다섯이면 아군과 적군이 교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신호다. 한양 목멱산(남산)봉수는 모든 봉수의 종착지다.

이철영 울산과학대 교수는 “조선은 봉수로 전국을 거미줄같이 연결했다. 특히 고령군 운수면 이부로산 봉수나 경주의 하서지 봉수, 칠곡의 박집산 봉수는 원형이 잘 보존된 상태”라고 말했다.

<협찬> (주) 지오씨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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