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1> 감문산(개령면)과 감문산성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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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7-15   |  발행일 2015-07-15 제13면   |  수정 2021-06-16 18:00
해발 320m 이곳(감문산 취적봉) 진산에 오르면 1700년 전 小國이 아른아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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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산성이 위치한 감문산 취적봉에서는 김천시 개령면 일대와 감천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주변 지형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관찰하기가 유리하다.


◆ 스토리 브리핑

한반도에서 한 나라의 도읍(都邑)과 산(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산은 배산임수(背山臨水)로 상징되는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도읍지가 갖춰야 할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매서운 겨울철 북서풍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 ‘방어’와 ‘감시’라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실제로 조선 제1궁인 경복궁 북편에는 북악산(北岳山)이 버티고 서 있으며, 고려 수도인 개경 역시 진산(鎭山)으로 송악산(松岳山)을 두었다. 신라 수도 경주의 경우에는 남산(南山)을 통해 불교의 이상향을 실현하려 했다.

1천700여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 또한 마찬가지다. 향토사학계는 감문국 궁궐지로 추정되는 김천시 개령면의 동부연당 인근의 감문산(甘文山)을 감문국을 지키던 진산으로 보고 있다. 감문산은 감문국 방어의 최일선이면서 선산·김천·상주를 잇는 교통의 중심 역할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감문산 정상부의 감문산성(甘文山城)은 감문국 방어의 1차 관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감문산성에는 봉수대 등의 군사시설 흔적이 남아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1편은 감문국의 진산인 감문산과 감문산성에 관한 이야기다.


궁궐터 동부연당 인근 위치한 진산
‘취적’‘성황’‘봉수’이름으로도 불려
나팔·해자 등 군사목적과 밀접 관련

속문·고소산성보다 낮지만 요충지
탁 트인 시야에 개령들·감천 펼쳐져
동태 감시와 수륙 교통관리에 최적

아도화상의 계림사 창건설화 흥미
등산로 중간 ‘108계단’도 눈길 끌어



# 여러 이름을 가진 감문산

감문산은 김천시 개령면에 위치한 해발 320m의 낮은 산이다. 개령면사무소를 지나 인근 동부리와 양천리 경계에 난 산길을 따라 오르면 감문산 정상으로 향할 수 있다. 감문산은 감문국 궁궐터인 동부연당과 가까이 있으며 감문국의 진산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한 점은 감문산의 이름이 여러 가지라는 것인데 그중 하나가 ‘취적산(吹笛山)’이다. ‘취적(吹笛)’이란 ‘피리를 분다’는 뜻인데, 해당 명칭은 김천시 개령면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김천에서는 감문국 시절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났을 때 취적봉에서 나팔을 불어 급변을 알렸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나팔’이 ‘피리’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군사활동이 취적봉 전설로 남았다는 의견도 있다. 2005년 경북대의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지표조사’에 따르면 신라 병사의 나팔 소리가 취적봉 전설의 원류다. 삼국시대 나팔소리를 이용한 군대 간 연락법이 후대에 이르러 봉수로 대체되었고, 전설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지표조사 결과는 ‘취적봉 전설이 고대 연락체계와 주민동원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감문산의 또 다른 이름은 성황산(城隍山)이다.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성벽과 함께 수로를 파 적의 침입을 막는 해자(垓子)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감문산에서 해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감문국 궁궐을 지킨 것으로 알려진 감문산성이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감문산은 감문국의 진산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의미에서 성황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감문산의 또 다른 이름은 봉수산(烽燧山)이다. 산 정상부 감문산성 한가운데의 평평한 고지에 봉수대 흔적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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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산 정상부 인근에서는 다양한 모양의 기와 파편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감문산성에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 초기 신라불교의 현장

감문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나쁘지 않다. 완만한 오르막에다 급경사마다 계단이 조성돼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다. 특히 등산로 중간지점의 ‘108 계단’이 눈에 띈다. 김천이 맺은 불교와의 인연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감문산에는 계림사(鷄林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곳의 내력이 범상치 않다. 계림사는 신라 눌지왕 3년(419) 고구려 승려이자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아도화상이 감문산에 계림사를 창건한 이유도 흥미롭다. 감문산의 작은 봉우리가 호랑이를 닮았다 해서 호두산(虎頭山)으로 불리는데, 당시 호두산 맞은편의 감천 건너 아포의 한골 주민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 사연을 전해들은 아도화상은 직지사를 짓고 있던 승려와 목수를 불러 절을 지었다. 호랑이의 거센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와 상극인 닭 ‘계(鷄)’자에 수풀 ‘림(林)’자를 써서 계림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한골에서는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계림사 창건설화를 뒤로한 채 등산로를 오르면 감문산성의 일부인 토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무성하게 자란 풀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인위적으로 쌓은 토성이 등산로 동편의 가파른 오르막에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완만한 경사의 등산로 서편에는 별다른 구조물이 없다. 자연구릉이 5개가량 있어 인위적 구조물 없이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토성 위쪽에는 돌로 쌓은 경계의 흔적도 보인다. 또한 등산로 주변에서는 기와 파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문산성에 건물이 있었으며, 수많은 군사가 주둔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학계는 출토 기와의 상당수가 통일신라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고 있다.

# 감문산성에 오르다

감문산 정상부인 취적봉에 오르면 감문산성의 형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취적봉을 둘러싼 감문산성은 주로 토성으로 이뤄져 있다. 석성과 같이 웅장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성채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취적봉에서는 ‘아~’ 하는 감탄사도 절로 내뱉게 된다. 감문국 지배세력이나 백성의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면, 한 나라의 국토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문산 최고봉인 취적봉은 320m에 불과하지만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다. 김천의 곡창지대인 개령들과 감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문산성이 유사시 피난처 및 지휘소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란 학계의 연구결과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감문산성의 전망은 인근의 산성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다. 감문산성은 인근 속문·고소산성보다 낮은 위치에 있지만 개령평야가 산성 바로 앞에 펼쳐져 있어 거칠 것이 없다. 주변지형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관찰하기가 매우 유리하다. 감문산성은 김천과 선산 상주를 잇는 수로 및 내륙교통로의 관리와 주변일대에 대한 감시에 최적화된 장소다.

감문산성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 대부분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산 정상 중앙부의 흙을 파내 중심부를 평평하게 조성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성 바깥으로는 급경사를 이루도록 흙을 쌓아 방어에 유리하게 했다. 감문산성이 위치한 감문산에는 군사들이 다녔을 법한 평탄한 땅이 산 정상부 주변을 휘감고 있다. 산성에 주둔하던 군사들이 머물고, 적을 막아내기에 손색이 없다. 만약 정상부에 소나무가 없었다면, 말을 탄 장수가 지휘를 할 수 있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감문산성에서는 봉수대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봉수대는 최정상부 남북방향으로 5개가 있다고 알려졌지만, 여간해서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흙을 쌓아 만든 봉수대의 흔적이 감문산 정상부에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감문산성 동편의 감문면 성촌리 뒷산에 또 다른 감문국 산성이 있다는 마을 주민의 제보도 있었다. 실제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와 일제강점기(1912년) 자료에도 김천시 감문면 성촌리에 성대산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2005년 김천시와 경북대의 조사 결과, 성대산성과 관련한 유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도움말=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공동 기획 :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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