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6> 창녕비와 감문국<상>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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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19   |  발행일 2015-08-19 제13면   |  수정 2021-06-16 18:14
멸망 300여년 지난 신라서도 ‘감문’이라는 國號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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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읍 만옥정공원에 위치한 창녕비(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의 모습. 창녕비에는 감문군주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신라 병합 이후 옛 감문국 지역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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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비의 내용을 해석한 안내판의 모습. 당시 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신라 귀족의 직급과 관등이 기록돼 있다.




<스토리 브리핑>

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은 신라에 병합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그 흔적은 후대까지 남았다. 대부분 유적이 김천시 일원에 산재해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감문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경남 창녕군 창녕읍의 창녕비(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감문국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비에는 ‘감문군주(甘文軍主)’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데, 학계는 이를 감문국의 신라 병합 이후 김천지역이 지녔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고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6편은 창녕비로 추정해 본 신라 병합 이후 감문국에 관한 이야기다.

561년 세워진 창녕 진흥왕 척경비
碑文에 ‘감문군주는…’글귀 존재
중요 국가회의에 참석했다고 기록
신라 편입에도 위상 여전 보여줘




# 창녕비와 감문국

경남 창녕군에 위치한 창녕비는 창녕읍 만옥정공원에 있다. 원래 화왕산에 있던 것을 192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창녕비는 신라가 대가야를 복속시키기 1년 전인 561년 신라에 의해 세워졌다. 창녕비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로도 불린다.

창녕비가 세워진 6세기 신라는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진흥왕(眞興王, 534~576)대의 신라 영토는 통일 전까지 신라가 확보한 최대의 영토였다. 신라는 555년 창녕지역을 점령한 뒤 하주(下州)를 설치하고 군주를 파견했다. 가야권이었던 창녕지역의 지배를 탄탄히 하고 가야세력의 반발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또한 신라가 창녕에 주를 설치한 것은 끝까지 저항하던 대가야를 멸망시키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다.

창녕비에서는 당시 신라의 행정체제를 엿볼 수 있다. 창녕비는 창녕에서 열린 신라 귀족들의 회의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그 관직과 직위가 나열돼 있다. 당시 신라 최고 의결기관인 화백회의 수장 상대등을 비롯한 고위 귀족과 각 주의 군주(軍主,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신라의 지방관)가 창녕에 모인 것이 적혀 있다.

1천여년의 세월 속에 비문 상당 부분이 지워졌지만, 감문국의 흔적은 ‘감문’이라는 글귀로 비문 속에 남아있다. 김천을 포함한 경북 서부 지역을 다스리던 감문군주(甘文軍主)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비문에는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급척간(及尺干)’이라고 적혀있다.

감문군주에 대한 기록은 신라 편입 이후 옛 감문국 지역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감문군주가 창녕에서 열린 중요 국가회의에 참석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비문을 바탕으로 신라 관리가 ‘감문’이라는 감문국의 국호(國號)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신라에 편입된 감문국

시기에 대한 이견은 존재하지만, 신라가 감문국을 정복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신라는 효율적 통치를 위한 고민 끝에 감문국을 감문군(甘文郡)으로 편제한다. ‘군’은 오늘날 기초자치단체 규모의 행정단위다. 대규모 행정단위로 현재의 광역시·도와 비슷한 ‘주’보다는 작지만, 면 단위인 ‘성·촌’보다는 크다. 감문국 또한 ‘주-군-성(촌)’ 순서로 대변되는 신라의 지방통치체제에 편입된 것이다.

당시 신라는 읍락국가를 병합한 후 해당 지역의 경제·교통·군사적 중요성과 멸망 당시의 힘 등을 고려해 지방행정 체제에 포함시켰다. 주목할 만한 점은 경북 지역 대부분 소국들이 하급 행정단위인 성·촌 단위로 신라에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감문국이 군으로 편제된 것은 경북지역의 읍락국가 중에서는 그런대로 규모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명대 사학과 노중국 명예교수 또한 “감문국이 개령군이 된 것은 여러 소국 중에서도 위상이 높았던 국가였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신라는 지증왕(智證王, 437~514)대에 주-군-성(촌)제를 편제하면서 최초로 실직주를 설치한 이후 주의 설치를 늘렸다. 이후 신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 수도 경주를 제외한 전국을 4개 주(州)로 나눈다. 신라는 전국을 상주(上州), 하주(下州), 신주(新州), 비열홀주(比列忽州)로 나누어 통치했다.

# 주치(州治)로 승격된 감문군(甘文郡)

신라는 요즘의 도청 소재지에 해당하는 주치(州治)를 각 주마다 설치했다. 상주(上州)의 경우 오늘날 상주(尙州)를 주치로 삼았으며, 하주는 경남 창녕을, 신주는 서울을, 비열홀주는 함경도 안변을 주치로 삼아 지방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

주의 중심인 주치는 신라 지방행정과 군사활동의 중심이었다. 주치를 담당하는 지역은 필요에 따라 바뀌었는데, 실제로 577년 상주(上州)의 주치가 상주(尙州)에서 감문(甘文)으로 바뀌었다.

상주(上州)의 주치를 감문으로 옮긴 이유는 기록에 없지만, 당시는 감문군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매우 부각되던 시기였다. 감문군이(甘文郡)이 감문주(甘文州)가 되면서 김천지역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을 것이다.

각 주는 군주(軍州)가 다스렸다. 군주는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고위관리다. 6세기 들어 중앙집권화를 탄탄히 한 신라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했다. 군주는 또한 왕의 대행자였다. 왕을 대신해 통치하는 것은 물론 지방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자가 군주였다. 진골 귀족이 개령(감문)으로 파견돼 상주(上州)를 다스리는 감문군주(甘文軍主)가 되었다.

특히 신라 4개 주에 파견된 군주는 창녕비에 구체적으로 거론돼 있다. 비자벌군주(창녕)·한성군주(서울)·비리성군주(안변)·감문군주(김천)가 적혀있다. 당시 신라는 지방통치의 최고수장인 4개 지역의 군주를 ‘사방군주(四方軍主)’라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557년 감문지역에 군주를 설치해 청주(靑州)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학계에서는 지리지의 청주 설치 기사를 오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공동 기획=김천시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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