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 태사묘

  • 류혜숙 객원
  • |
  • 입력 2016-02-19   |  발행일 2016-02-19 제38면   |  수정 2016-02-19
날개 편 독수리마냥…이곳에선 그림자도 묘우를 지키고 있다
20160219
고려의 개국 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태사묘.
20160219
보물인 삼태사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보물각과 주사건물.
20160219
안중할머니와 안금이의 위패를 모신 안묘당.
20160219
강당인 숭보당과 안동김씨, 권씨, 장씨 대종회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동·서재.
20160219
병산전투 승리 이후 전승되어온 차전놀이의 용구를 보관하는 차전각.


북문동. 안동부성의 북문이 있던 동네다. 자그마한 로터리와 크고 작은 현대식 건물들, 오래된 시장과 그리 번잡하지 않은 도로에서 구 시가지임을 느끼게 된다. 로터리에서 빠져나온 아스팔트가 저 멀리로 솔아지는 골목길. 다만 몇 걸음 사이 더욱 적요해진 거리 속에 커다란 이층의 누각이 어연번듯이 서있다.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웠던 세 사람 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위패를 모신 태사묘(太師廟)다.

왕건의 고려 건국 도운 후 태사 벼슬
김선평·권행·장정필 위패 모신 곳

경모루 지나 맨먼저 만나는 숭보당
그 뒤 안쪽 깊숙이 자리한 태사묘
잠긴 문 담 너머로 묘정비 이수 빼꼼

술 빚어 승리 이끈 안중할머니 설화
문지기 안금이 마지막 소원도 흥미

◆ 안동의 상징, 태사묘

신라가 멸해가던 10세기 초, 권력의 중심은 지방의 호족들로 재편되고 있었다. 가장 강성했던 세력은 후백제의 견훤이었고, 왕건은 시나브로 힘을 키워나가던 때였다. 8세기 경덕왕 때부터 고창군으로 불렸던 안동은 고려군이 남진해 신라에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였기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잦았다. 그러나 왕건은 아직 견훤의 세력을 꺾을 만큼 강하지 못했고 상주 출신의 견훤에 비해 개성을 근거로 한 왕건의 지역적 기반은 매우 약했다. 927년 대구 공산전투에서 승리한 견훤이 점차 북진함에 따라 결국 왕건은 설욕을 위해 남진한다. 그리고 두 나라는 고창, 지금의 안동에서 만난다. 930년 정월의 고창 병산 전투다.

왕건은 승리한다. 이로써 안동, 울산, 청송, 강릉에 이르기까지 11개 성이 고려에 귀부하였고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이 승리의 중심에 지역의 호족 세력이었던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있었다. 왕건은 이들의 공을 기려 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장정필과 권행은 대상(大相)으로 등용하고 군을 부로 승격시켜 안동(安東)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뜻이다.

경모루(敬慕樓) 현판이 달린 누각을 통과해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숭보당과 동·서재다. 숭보당은 회의를 하고 참가자들이 숙식을 하는 강당이다. 동재와 서재에는 김씨, 권씨, 장씨 대종회라는 현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신(新)안동김씨의 시조는 김선평, 안동장씨의 시조는 장정필, 안동권씨의 시조는 권행이다. 권행은 본래 신라에 속한 김씨였다고 한다. 후에는 후백제에 속한 고창의 수령으로 있다가 고려 공신이 된 후 태조로부터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승리했으니 공신일 터, 승리했으니 안동일 터. 왕건이라는 인물과 정세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치밀한 분석의 결과가 아니겠나.

세 사람은 이후 태사(太師)의 벼슬에 올라 삼태사라 하고, 그들의 위패를 모신 곳을 태사묘라 한다. 태사묘는 숭보당 뒤 안쪽 깊숙이 자리한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성종 2년인 983년에 처음으로 삼공신의 제사를 안동부사가 거행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묘우는 조선 중종 때 세운 것으로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다시 세웠다. 문은 잠겨 있고 높직한 담장 너머로 삼태사 묘정비의 이수가 보인다. 숭보당 지붕 그림자가 펼쳐진 독수리 날개처럼 묘우를 지키고 있다.

◆ 안금이와 안중할머니의 위패를 모신 안묘당

숭보당 왼쪽에 안중(安中)할머니와 안금이(安金伊)의 위패를 봉안한 두 칸 규모의 안묘당(安廟堂)이 있다. 안중할머니는 병산전투 당시 고삼으로 술을 빚어 견훤의 군사들을 취하게 만든 뒤 삼공신군에게 급습하게 했다는 설화의 주인공이다. 안금이는 조선 임진왜란 시기 때 태사묘의 문지기였던 사람이다. 그는 난이 일어나자 삼태사의 위패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3년 동안 봉심한 인물이다. 그는 난이 지난 후 위패를 다시 태사묘에 모셨다 한다.

이에 나라에서는 안금이에게 벼슬을 내리려 했지만 그는 거절한다. 문지기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세상을 떠날 때 그는 한 가지 소원을 말한다. 태사묘 제사에 올린 바로 그 음식으로 자신의 제사상을 차려 달라고. 나라에서는 안금이가 죽은 후 첨지 벼슬을 내리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후 안묘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태사묘의 제사 음식을 다시 쓴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태사묘의 뒤안에서

숭보당 오른쪽에 있는 작은 협문을 지나면 태사묘 관리인이 주거하는 주사 건물과 보물각이 자리한다. 보물각에는 삼태사의 유물과 왕으로부터 받은 교지가 보관되어 있다. 붉은 칠을 한 잔,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 타원형 날개가 달린 검은색 관모, 끝이 제비꼬리 모양인 숟가락, 마를 덧댄 목이 긴 가죽신발, 비단천으로 만든 부채, 공민왕의 친필로 보이는 교지 등 12종 22점이 보물 제4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어느 것이 누구의 유물인지 구분할 수는 없지만 1천 년 전 고려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한다. 보물각은 주사의 관리인이 언제나 매의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대각선 자리에 있다. 그 가운데 벚나무 한 그루가 고적하게 서 있다.

보물각 옆길로 들어가면 제법 넓은 뒷마당에 차전각이 자리한다. 안동 차전놀이는 병산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전승된 것이다. 견훤을 낙동강으로 밀어 넣었다는 데서 생겼다고도 하고 삼태사가 수레 여러 개를 만들어 타고 견훤의 군대를 밀어냈다는 데서 생긴 놀이라고도 한다. 전각에는 놀이의 용구가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

태사묘의 뒷마당은 외담과 내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담은 태사묘의 묘우 공간과 보물각 공간을 가르고 있지만 마치 뒷마당을 감싸는 것처럼 느껴진다. 외담은 그리 높지 않지만 결연히 경계서 있고, 그 너머 한 뼘 사이로 둘러선 건물들은 겹으로 뒷마당을 감싼다. 그 속은 몇 그루 나무만이 전부인 호젓한 뒤안이다. 묘우의 대숲이 이따금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역사의 뒤안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남안동IC로 나가 안동 시청 쪽으로 간다. 목성교네거리에서 우회전해 중앙파출소 옆길로 약 50m 가면 태사묘다.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걸어갈 수 있다. 태사묘의 보물각은 1월1일과 설, 추석에만 개방한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