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희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러시아 무르만스크와 테리베르카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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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0   |  발행일 2017-01-20 제37면   |  수정 2017-01-20
세상 끝 하늘서 오로라의 배웅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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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비행기 안에서 만나게 된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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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이면 무르만스크는 온통 눈으로 뒤덮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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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무명 병사를 기리는 거대 콘크리트상인 ‘알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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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베르카 도착 후 이 눈길에 차가 빠져 결국 언덕 너머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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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만난 황홀한 야경.

오로라를 보기 위한 캐나다 신혼여행
그때 “결혼 10주년에 다시 가자” 약속
사흘 연휴 때‘러’ 최북단 무르만스크行
한겨울 종일 해 안 뜨거나 여름엔 白夜

첫날 기다리던 밤 금세 왔지만 구름세상
이틀째 120㎞ 눈길 달려간 테리베르카
해질녘 퍼붓듯 뒤덮는 구름에 또 좌절
다음날 귀가 비행기 날개끝서 희미한…


러시아 최북단의 항구도시 무르만스크. 그 멀리까지 간 건 순전히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였다. 시간을 거슬러 나의 신혼여행지가 캐나다였던 것도 역시 오로라 때문이다. 그때 남편과 한 약속 중 하나가 결혼 10주년이 될 때까지 한 방을 쓰고 있다면 다시 오로라 사냥을 떠나자던 것. 말이 씨가 된다더니, 미래가 어찌 될지도 모르면서 툭 내뱉은 그 말을 어쩌다 보니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돼버렸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은 주로 극지방인데 우리는 러시아에 살고 있었고 북극권에 속하는 무르만스크가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에, 그리고 하필이면(!) 결혼기념일이 있는 주말이 국경일에 이어 사흘 연휴지 않은가.

오로라는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초현실적인 자태지만, ‘태양에서 날아오는 대전입자와 지구 자기장이 결합해 나타나는 방전현상’이라는 아주 현실적이고 딱딱한 말로 설명된다. 무르만스크 외에도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알래스카 등 북위 60~80도 사이에서 백야 현상이 나타나는 여름철을 제외하고 봄과 가을, 특히 겨울이 관찰하기 좋다. 또 태양 흑점 활동이 왕성할수록 발생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오로라 여행을 계획한다면 예보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AURORA FORECAST(www.auroraforecast.com)는 오로라 활동성을 10단계로 설정하고 3일간의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다. 숙지할 점은 관찰 여부의 최대 복병인 구름이다.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자연의 일이다 보니 먼 길 떠났다가 구름 때문에 헛걸음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날씨나 오로라 예보에 맞춰 휴가를 정할 수 없으니 정해진 여행 기간에 운이 따르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나에겐 사흘이란 시간이 있었다. 오로라 예보를 보니 구름만 끼지 않는다면 그 무렵 무르만스크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았다.

무르만스크는 내가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행기로 2시간이면 도착한다. 기차로도 갈 수 있는데, 26시간을 꼬박 달려가야 하니 비용이 부족하고 시간은 많을 때 이용하면 좋다. 기차 여행 시 러시아 북부 카렐리야 지방의 아름다운 경치는 덤이다. 무르만스크는 북극권(북극선 66도 33분 이상)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다는 맥도날드와 철도역이 바로 이 동네 소속이다. 노르웨이와 핀란드 꼭대기 국경에 접해 있고 이들 나라로 넘어가는 버스도 운행된다. 북방함대의 기지여서 구소련 시절에는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었고, 우리에겐 1978년 대한항공 여객기가 불시착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겨울에는 온종일 해가 안 뜨는 날이 있고 여름이면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도 일어나는 신기한 곳이다.

오로라야 어차피 밤이나 돼야 볼 수 있을 테니 첫날 낮엔 무르만스크 시내를 둘러봤다. 때마침 ‘마슬레니차’(러시아 봄맞이 축제) 주간이자 국경일인 ‘조국 수호자의 날’이어서 시내 광장은 구경거리가 풍성하다. 본래 볼거리가 많은 도시는 아닌데 유명한 것은 몇 가지 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무명 병사를 기리는 거대 콘크리트상인 ‘알료사’와 그곳에서 내려다본 전망, 세계 최초의 핵발전 쇄빙선 ‘레닌 호’가 그것. 북극권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아지무트 호텔이 시내 중간에 우뚝 솟아있고 그 주변으로 북극해를 낀 도시 풍경도 이색적이다. 거기까지 찾아오는 동양인이 별로 없어서인지 오히려 내가 볼거리가 된다는 점도 재미있다. 그때는 한겨울이어서 기다리던 밤은 금세 찾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늘은 작은 구멍 하나 없이 아주 매끈하게 구름으로 뒤덮였다. 그 구름 장판 뒤로 초록의 오로라가 일렁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밤이 깊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왠지 억울한 기분도 들고 구름만 원망스러울 뿐. 기다리면 걷힐지 몰라 기대를 버리지 않았는데 동이 트는 것도 금방이다. 소중한 첫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오로라 사냥을 위해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테리베르카다. 이 작은 어촌은 무르만스크에서 북동쪽으로 120여 ㎞ 떨어져 있다. 테리베르카는 러시아 영화 ‘레비아판’(한국 제목 리바이어던)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영화 예고편에 등장하는 묘한 풍광에 홀려 이리저리 찾아봤더니 이 동네에서 찍은 오로라 사진이 또 기가 막힌 거다. 오로라 사냥을 계획할 무렵이었으니 테리베르카까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르만스크는 됐고, 아예 테리베르카에서만 2박을 할까 싶어 웹사이트를 둘러보니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그곳까지 가는 눈길. 모스크바에 사는 러시아인이 몇 년 전 블로그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구급차 포함, 차량 3대가 함께 움직이며 쌓인 눈을 뚫다시피 해서 간 거였다. 차 한 대로 테리베르카로 향하다가는 차가 고장 나거나, 미끄러지거나, 중간에 고립돼 얼어 죽기 딱 좋은 것으로 블로그는 묘사하고 있었다. 눈으로 뒤덮여 ‘길’이랄 것도 없고, 주변을 오가는 차도 거의 없다고 한다. 결론은 ‘거의 불가’. 그래도 혹시 몰라서 렌터카 회사 중 한 곳과 미리 연락해놓고 테리베르카행은 무르만스크에 도착한 후 상황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둘째 날이 되니 하늘이 쾌청하고 쌓인 눈도 많지 않다. 꼭 테리베르카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북쪽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일단 차를 빌리고 길을 나섰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테리베르카를 향해 천천히 직진. 눈 때문에 약간 위험한 구간이 있긴 했지만 가는 길은 우려했던 것과 달리 평탄하다(정작 눈길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진땀을 뺐던 건 가는 길이 아니라 테리베르카에 도착한 후였다). 우리는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눈으로 뒤덮인 툰드라 지대를 느리게 달려 3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는 동안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해서 엄청나게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땅과 차가운 공기, 파스텔 색조의 오묘한 하늘, 뼈대만 남은 선박들. 차를 몰고 온 이방인을 경계하는 눈빛까지 더해 테리베르카 풍경은 낯설지만, 이국적이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평화도 오래가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는데 이럴 수가.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던 구름이 어디선가 나타나 하늘 한구석에 걸쳐있다. 낮엔 그렇게 맑더니 해 질 무렵이 되자 누가 퍼붓기라도 하듯 급속하게 퍼지는 구름. 동동거리는데 근처를 지나던 노인이 인사를 건넨다. 그 외딴 마을에서 70년은 족히 살았을 것 같은, 동네 일기예보쯤은 눈 감고도 할 것 같은 이 노인은 ‘오늘은 오로라 못 봐. 그러니 들어가서 보드카나 한잔해. 오늘 마슬레니차인 거 알지? 들어가자!’ 하길래 그래도 우린 기다릴 거라며 우는 시늉을 했는데 사실은 정말 울고 싶었다.

북극해를 바라보며 부디 구름이 걷히게 해달라고 빌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1시간30분 정도를 차에서 기다렸을까.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바지를 뚫고 들어온다. 손끝, 발끝은 이미 얼어있다. 물론 장갑도 끼고 털 부츠도 신었지만, 극지방 겨울의 시동 꺼진 차 안은 바깥과 별반 다를 게 없이 몹시 추웠다. 시간이 흐르자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는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보이던 달빛마저 사라지는 걸 보고 우리는 결국 마음을 접었다. 이틀 밤을 이렇게 보내버리다니. 돌아가는 길엔 출처를 알 수 없는 붉은빛에 눈과 나무가 물들어 있었다. 그 광경이 매우 아름다워 울적한 마음이 금세 사라진다. 비록 오로라 사냥엔 실패했지만, 그 길에서 만난 툰드라 지대 설경은 몇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을 만큼 황홀하고 감동적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밤은 다음 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그것도 무르만스크 상공에 떠 있을 그 짧은 시간뿐이다. 남편에겐 마음을 비운다고 했지만, 사실은 마음속으로 꽤 기대하고 있었다. 날씨도 좋고 오로라 활동도 최고수준인 데다 고도가 높으니 구름 따윈 상관없잖은가. 승객을 가득 채운 비행기가 서서히 활주로를 벗어나고 상공에 자리 잡을 때까지 잠시 불을 끈다. 기내가 어두우니 밖이 잘 보인다. 캄캄한 밤하늘엔 별만 하나둘. 오로라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번에도 못 보는 걸까. 비행기 날개에 달린 빨간 등만 깜빡깜빡하는데… 날개 끝에서 뭔가가 아주 희미하게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어, 이거 본 건데, 예전에 본 건데 이거!" 예전에 본 그것은 바로 오로라가 시작될 때의 모습이었다. 너무 흥분해서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기내에 불이 켜지는 바람에 창에 반사되는 불빛을 막느라, 서로 자리 바꾸느라, 그 와중에 사진까지 찍느라 난리를 쳤다. 이제 막 피어오른 오로라는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커지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며 우리를 한껏 홀려놓았다.

10년 전 약속은 결국 지켜졌다. 돌이켜보면 오로라를 보지 못했더라도 여행을 망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경험을 했으니 다른 의미로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나 사진으로 미리 본 적 없는 풍경, 계획에 없던 경로, 거기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로 인해서 말이다. 이 여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그 여정만으로도 가슴 벅찰 때도 잦다. 물론 계획했던 대로 오로라를 볼 수 있어서 더 만족스러웠던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여행칼럼니스트 android201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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