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의 電影雜感 (전영잡감) 2.0] ‘보통사람’이 만드는 시대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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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19   |  발행일 2017-05-19 제43면   |  수정 2017-06-28
“상식이 통하는 시대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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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지난 몇 개월간 이어지면서 그 기간 극장을 찾아야 할 관객들이 TV와 인터넷뉴스만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몇몇 좋은 영화들이 그에 합당한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극장에서 속속 내려졌다. 오늘 이야기하게 될 영화 ‘보통사람’ 역시 그렇게 보내버리기엔 너무나 아깝고 안타까운 영화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감독이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간 투자자마다 투자에 난색을 표한 데다 모태펀드 투자까지 거절당한 바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모태펀드는 정부 부처가 출자한 자금으로 기업이 아닌 개별펀드에 투자하여 벤처기업이나 문화산업에 간접 지원하는 형태로 운용된다. 영화투자 같은 경우 문화체육관광부나 영화진흥위원회가 문화예술진흥기금과 영화발전기금의 투자조합출자사업 예산을 이 모태펀드에 출자하면 한국벤처투자가 이 기금을 민간 투자금과 함께 결성해 제작사나 작품에 투자하는 식이다. 그러나 영화계 종잣돈 구실을 하는 모태펀드 투자가 원전의 위험성을 지적한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나 광주5·18항쟁을 다룬 ‘택시운전사’ 같은 작품은 거절하고, 2002년 NLL을 침범한 북한과 해군 사이에 오간 교전을 담은 ‘연평해전’이나 반공영화의 현현한 ‘인천상륙작전’ 같은 작품들을 지원을 하였던 게 지난 박근혜 정권이었다.


‘히어로’ 김봉한 감독 新作 ‘보통사람’
호헌조치 발동 등 격동의 80년대 배경
평범한 삶 꿈꾸던 보통사람들 이야기
모태펀드 투자서도 배제된 영화라 눈길

공들여 재연한 세트와 상황들 맞물리며
손현주·장혁·김상호 압도적 연기 재미
지금 이 시대까지 뜨거운 울림 선사해


십년지기 친구 배우 오정세를 주연으로 기용한 전작 ‘히어로’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김봉한 감독의 ‘보통사람’은 1987년 호헌조치 발동을 전후로 군사정권이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여러 사건을 기획하고 실행한 만행들을 스크린으로 불러낸다. 국가에 충성하는 강력계 형사와 국가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안기부 실장, 진실을 찾아 헤매는 기자를 차례로 선보였는데, 제작진이 공들여 재연한 세트와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관객의 분노와 눈물을 이끌어낸다. 거기에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를 보는 재미 또한 크다.

먼저 주인공인 강력계 형사 추성진을 연기한 배우 손현주는 ‘숨바꼭질’ ‘악의 연대기’ ‘더 폰’으로 이어지는 스릴러 영화들이 관객의 사랑을 받아오며 믿고 보는 배우가 되었지만, 사실 김 감독이 의도했던 건 과거 드라마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수더분한 소시민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실제 극중에서 배우 라미란과 펼치는 생활연기를 그보다 더 잘 소화할 수 있는 충무로 배우들이 몇이나 될까.

추성진을 자신의 공작에 이용하고 곤경에 빠뜨리는 최연소 안기부 실장 최규남을 연기한 장혁은 솔직히 놀랐다. “양지든 음지든 그게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 아니겠느냐”며 나른한 말투로 사람들을 제압하는 모습은 그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개봉 전 열린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혹시 공안검사 출신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패러디한 캐릭터 아니냔 질문이 나왔을 때, 김 감독은 “영화 한 편을 준비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데 지금의 이 사태를 알고 넣었겠느냐”며 “완벽한 우연의 일치”라고 부인했으나, 이후 한 영화 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선 그것을 의도했다며 오히려 김 전 실장을 염두에 두고 재구성한 캐릭터임을 드러내는 대사까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장관 집이나 국회의원 집만 골라서 터는 ‘발바리’를 잡아오라는 반장의 요구로 대신 잡혀왔다가 연쇄살인범으로 몰리는 용의자 김태성을 연기한 조달환은 이 역할을 위해 체중을 무려 14㎏이나 감량하며 한국영화 사상 전무후무할 연기를 펼친다. 그가 연기한 김태성은 1975년 전국을 돌며 17명을 살해한 혐의로 검거돼 1976년 사형 당한 ‘한국 최초의 연쇄살인범’ 김대두를 모델로 삼았다. 실제로 김 감독이 2003년 ‘살인마 김대두’라는 제목으로 처음 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박근혜 정권에서 유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제작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 배경을 1980년대로 옮겼다고.

추성진의 친형이자 정의로운 민완기자 추재진을 연기한 배우 김상호 역시 든든하게 영화를 받치고 있다. 추재진이 정권의 거대한 힘에 맞닥뜨리게 되는 과정에서 모델로 삼은 인물은 의문사한 고(故) 장준하 선생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상호가 영화 ‘특별시민’을 연출한 바 있는 박인제 감독의 데뷔작 ‘모비딕’에서도 비슷하게 정의로운 기자를 연기한 적이 있었다. 정작 김상호는 그들이 특별히 정의로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직업이 기자이며, 기자는 당연히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신 발언을 하기도 했다.

영화의 중반부. 안기부에 쫓기다 성진의 집까지 찾아온 재진에게 성진은 형이 뭔데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냐며 다그친다. 이에 재진은 대답한다. “보통사람, 상식이 통하는 시대에 살고 싶은 보통사람”이라고. 평범하지 않았던 시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그 보통사람들의 크고 작은 희생을 기억한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섰던 시민들의 마음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보통사람들의 힘들이 모여 만든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새로운 대통령이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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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선 블랙리스트로 대표되는 지난 정권의 문화예술 정책들을 전면 폐기하고 예술인 창작권을 보장하고, 복지 수준 향상을 위해 예술인 실업급여제도를 도입하며 창작·주거 인프라 조성과 안정적 일자리 확충에 힘쓰겠다고 새 대통령은 약속했다. 그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1987년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발표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조작 은폐가 폭로되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던 시민들의 분노가 만든 6월 항쟁 당시 거리에서 펄럭이던 태극기가 30년이 지난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넘어간 것을 보니 답답했다. 그들도 품어 안을 수 있는 정부가 될 수 있을까. 성진의 아들 민국이 친구들의 괴롭힘에도 왜 저항하지 않냐는 아빠의 채근에 “가만히 있으면 빨리 끝나”라고 한 말이 주는 울림이 오래 컸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재진이 성진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처럼 “다 잘될 거야”라는 희망도 잊지 말기를. 독립영화감독, 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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