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 청송읍, 읍치의 건축 - 운봉관·찬경루·만세루·청아루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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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21   |  발행일 2017-06-21 제13면   |  수정 2021-06-21 16:50
첩첩산중에서 왕후가 나온 후…지극한 禮의 공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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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청송읍 월막리에 위치한 운봉관. 운봉관은 조선시대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들의 숙소였지만 중앙 정당은 왕의 전패를 모신 왕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때 정당과 서익사가 파괴되고 오른쪽 동익사만 화를 면했는데, 지금의 모습은 2008년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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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관 현판. 운봉(雲鳳)은 ‘구름 속의 봉황’이라는 뜻인데, 임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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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향교 앞의 청아루. 2층 누각인 청아루는 향교의 대문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한때 청송중학교의 임시교실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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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왕후를 배출한 청송심씨 후손들은 용전천이 넘쳐 시조묘를 찾을 수 없을 때 찬경루에서, 천은 건넜으나 비가 오는 날엔 만세루에서 제사를 지냈다. 왼쪽부터 찬경루, 용전천에 놓인 섶다리, 용전천 건너 보광사 경내에 자리잡은 만세루.

 

 

◆시리즈를 시작하며

예로부터 누각과 정자를 일컫는 누정(樓亭)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누정은 선조들의 정신과 혼이 깃든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누정은 거닐면서 경치를 감상하는 유상(遊賞), 독서하고 강론하는 강학(講學), 조상의 은덕을 생각하는 추모(追募)의 공간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돼 왔다. 

 

특히 이러한 누정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경상도에 많았고, 그중에서도 자연풍광이 뛰어난 청송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영남일보는 청송지역의 누정을 둘러보고, 그 속에 담긴 선조들의 정신과 가치를 재조명하는 ‘청송의 魂(혼) 樓亭(누정)’ 시리즈를 연재한다. 

 

시리즈는 청송의 누정에 얽힌 사람살이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누정에 남겨진 시문(詩文)과 누정의 내력을 담은 누정기(樓亭記)도 집중 조명해 선조들의 풍류와 사상을 엿본다. 시리즈 1편에서는 청송읍에 위치해 있는 운봉관과 찬경루, 만세루, 청아루에 대해 다룬다.


세종의 妃 소헌왕후를 배출한 땅
고을 중심에 객사 운봉관 자리잡아
왕후배출 경사 찬미한다는 찬경루
川 건너 청송심씨 시조묘 바라봐
만세루와 함께 제사지내던 재각

지금은 소헌공원으로 불리는 곳
군민의 안녕 기원하는 열린공간

 

 

 

중앙로. 청송읍의 메인 스트리트다. 좁은 도로에 조막조막한 건물들이 도열해 있는 보통 소읍의 모습이지만 청과 관, 법과 치안, 토지와 전력, 교육과 방송 등 공적 건물이 집중되어 있는 청송의 핵심부다. 뒤로는 방광산(放光山)이 낮게 또렷하고, 앞으로는 용전천이 은빛 모래사장을 거느리고 넓게 흐른다. 산 아래 천 따라 길게 자리한 청송읍 땅은 아주 오래전부터 청송의 중심이었다.

#1.중심의 힘, 운봉관

중앙로 십자로에서 옛 건축물의 뒷모습을 본다. 단정한 권위와 순정한 위엄에 사방 빛이다. 화려한 공포는 도리어 무구하고, 천진한 바윗돌로 쌓아올린 낮은 석축이 담담히 선량하다. 양쪽에 긴 날개채는 기둥 속에 밝은 세계를 들여 가볍고, 가운데 세 칸 정당은 깨끗한 벽으로 감싸 무겁고 귀한 공간임을 알겠다. 청송군의 객사, 운봉관(雲鳳館)이다.

운봉이란 구름 속의 봉황. 귀한 이 임금을 뜻할 게다. 객사는 조선시대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들의 숙소였지만 중앙 정당은 왕의 전패를 모신 왕의 공간, 임금 그 자체였다. 하여 객사는 어느 고을에서나 가장 중심된 곳에 으뜸 되는 형식으로 지어졌다. 길 떠나 아무리 낯선 고을에 닿아도, 객사가 자리한 곳이 바로 그 땅의 중심임을 알았다.

객사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국의 읍치에 동일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정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익사를 배열하는 것, 정당의 지붕은 익사보다 한 단 높은 것. 이런 기본은 전국의 읍치에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운봉관 역시 그러한 기본을 따르고 있다.

청송 객사가 지어진 것은 세종 10년인 1428년, 군수 하담(河澹)에 의해서다. 청송심씨 심온의 딸이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에 오르고, 인구 1천명도 되지 않았던 작은 현이 세조 5년인 1459년 도호부로 승격되고도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다. 도호부라 해도 이 오지의 땅에는 읍성이 없었고 다만 방광산 아래에 관아 건물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지세가 곧 성이었다. 군수 하담은 ‘땅이 궁벽함으로 하여 사신이 오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소탈하게 전한다.

첩첩산중 청송, 부임해 온 관리들은 이 땅에 들어 망연히 울었다 했던가. 그러나 떠나갈 때도 그들은 눈물 흘렸다. 청청한 땅의 순박한 마음들을 그들은 애민했고, 사람들은 떠나가는 이들을 오래 기억했다. 운봉관 오른편에는 청송의 역대 관리들의 치적을 기리는 불망비와 선정비가 모여 있다. 좋은 기억들이 모여 중심의 힘에 더해진다.

청송도호부의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훼손되었다. 객사 역시 1918년 정당과 서익사가 파괴되었다. 동익사만이 화를 면해 한동안 운봉관 현판을 걸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은 2008년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동익사 기둥이 보다 어두운 것은 그 때문이다. 파괴의 의미는 알 만하나 동익사의 보존은 갸웃하다. 내재된 힘의 반력에 움찔하였던 것일까. 동익사 앞 한 그루 탱자나무는 알고 있을까.

#2.지극한 예의 공간, 찬경루와 만세루

운봉관 평평한 마당은 용전천을 향해 서서히 낮아지다 뚝 떨어진다. 천변 절벽의 가장자리 기울어진 땅에 찬경루(讚慶樓)가 서 있다. 군수 하담이 운봉관과 함께 지은 누각이다. 보통 객사에 부속된 누는 조정 사신의 연회나 유생들의 시문회 장소 등으로 사용되지만 찬경루는 그와 같지 않다. 찬경루는 용전천 건너 보광산을 바라보고 있다. 저곳 가파른 산줄기가 급히 흘러내리다 평지를 이룬 자리에 등잔대의 호롱불 같은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묘가 있다. ‘찬경’이란 ‘소헌왕후를 배출한 경사를 우러러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누는 천이 넘쳐 시조묘를 찾을 수 없을 때 제사를 지내던 재각(齋閣)이다.

누 기둥은 땅의 생김 그대로 세워 올려 저마다 길이가 다르다. 구름 같은 문양이 새겨진 사각의 주춧돌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북쪽 양측 칸에 쌍여닫이 판문을 달고 그 앞에 계단을 놓아 누상으로 오르게 하니, 판문을 마주해 이미 손이 가지런해진다. 소박한 익공에 단청이 화려하고, 평방 부리마다 피어난 태평화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천변 둑길에 올라 바라보면 객사 정당인 운봉관이 가림 없이 온전하고, 찬경루는 동익사 앞에 지붕 합각면이 정면인 채로 서있다. 운봉관에 대한 예와 보광산 시조묘를 향한 예가 동시에 구현된 모습이다. 지금 운봉관과 찬경루 일대는 ‘소헌공원’이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있는 이곳에서 지금도 청송의 안녕을 기원하고, 군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오래된 중심의 힘은 지금 공공의 중심을 지지하고 있다.

찬경루 앞 용전천에 섶다리가 놓여 있다. 강물이 불어도 시조의 묘를 찾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오랜 세월 사라졌던 섶다리는 약 15년 전부터 다시 놓였다. 천 건너 근곡리와 덕리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서다. 이 다리 덕에 읍으로 향하는 그들의 보행이 편해졌고, 읍 사람들 역시 천 너머 보건소를 오가는 일이 편해졌다. 덕을 찬한 예가 오늘의 덕으로 이어진다.

섶다리 건너 방광산에 닿으면, 청송심씨 시조묘 아래 보광사와 만세루가 있다. 천은 건넜으나 비가 오는 날, 심씨 후손들은 만세루에서 제사를 지냈다. 세종이 군수 하담에게 명해 건립했다고도 하고, 소헌왕후가 제향을 위해 보광산을 찾았다가 사찰은 원당으로 삼고 만세루와 추모재를 지었다고도 한다.

추모재는 한순간 파르르 먼지가 되어 버릴 듯 퇴락했던 것을 최근에 산뜻하게 고쳤다. 극락전의 바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던 것을 오십 보쯤 뒤로 물렸고, 주련이 있는 중앙 기둥은 옛것 그대로다. 웅장한 만세루는 눈앞의 산음에 조아리는 듯도 하고, 몸을 곧추세워 우러르는 듯도 하다. 햇살 넉넉한 그리 넓지 않은 땅이 송백에 둘러싸여 새집처럼 안온하다.

#3.도(道)와 미(美)와 용(用)이 하나 된 공간, 청송향교 청아루

운봉관이 있는 중앙로 십자로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정면에 군청이 보이고 그 오른쪽 아래에 청송의 오래된 학교 향교가 자리한다. 향교는 유교국가 조선왕조가 각별히 중요시한 건물로 객사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법칙을 따랐다.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기본으로 전묘후학 또는 전학후묘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배치였다. 청송향교는 좌묘우학이다. 이는 유교적 이념에 의한 원칙 아래 풍토에 맞게 재편된 모습이라 하겠다.

향교의 대문인 외삼문은 2층 누각인 청아루(菁莪樓)다. 외삼문을 누문으로 만든 것은 드문 예다. 청(菁)은 우거지다는 뜻을, 아(莪)는 쑥을 뜻한다. ‘우거진 쑥’이라는 ‘청아’는 시경에서 유래한 말로 무성한 쑥과 같은 인재나 그 인재를 교육하는 일을 뜻한다. 지붕을 고치고, 단청을 새로 칠하고, 누문을 달고, 기와를 얹은 토석담으로 경역을 두른 것은 최근의 일이다.

누는 빈 마루다. 이 마루는 한때 청송중학교의 임시교실이었다. 빈 공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거개 그 쓰임은 유전된다. 그것은 곧 예이기도 하다. 대들보는 나무의 곡진 몸 그대로다. 미가 도이고 도가 미다. 도와 미와 용이 하나 된 공간이 청아루다. 건축은 시대의 상징, 읍치의 건축물은 시대를 꿰뚫는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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