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3> 마을의 자연을 정원으로 삼다 - 영이정·파서정·만취정과 만취서당·동은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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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05   |  발행일 2017-07-05 제13면   |  수정 2021-06-21 16:54
산과 강, 낙조와 달빛사이…無垢(무구)의 세계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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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읍 청운리 동쪽의 용전천 절벽 위에 자리잡은 영이정. 영이정의 ‘영이(詠而)’는 평해황씨 청송 입향조인 황덕필 선생의 자호다. 1739년(영조 15) 마을 한가운데에 세워졌고, 1945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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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읍 청운리 서편을 돌아나가는 용전천 물굽이 위 언덕에 파서정이 자리하고 있다. 파서정은 유유자적하며 도를 즐겼던 가의대부 황정필이란 인물을 기리기 위한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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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산 중턱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만취정. 주변에 잡목이 우거져 있는 데다 산 사면을 타고 돌아가야 해 접근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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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읍 청운리에 자리한 만취서당. 만취서당은 조선 후기 유학자 만취동 황학 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로, 황학의 후손 황대손이 1830년 지었다.

 

청송읍을 지난 용전천(龍纏川)이 남쪽 5㎞ 정도에 다다랐을 때, 천(川)은 보광산의 북동 자락과 성황산 사이에 붙잡혀 크게 몸부림친다. 몸부림은 단애와 소를 만들고, 부채꼴 모양의 땅을 만들고, 너르고 비옥한 땅을 만드니, 사람들은 부챗살 모양의 마을을 일구고, 산 많은 청송에서 가장 너른 들을 경작했다. 청송읍 청운리(靑雲里). 이 땅의 아름다움은 일찍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을 이룬 은자들은 대 이어 살면서 그 아름다움에 이름을 주었다. 깊은 소는 ‘가마소’ ‘은어소’라 하였고, 마을을 감싼 용전천은 ‘청운하천’이라 특별히 아껴 불렀으며, 동리의 각별한 경치를 ‘취동팔경(翠洞八景)’이라 받들었다. 그리고 단애와 산중턱과 마을의 고지대에 정자를 지어 이 모두에 스며들었다.

#1. 시간과 시간을 이어 오늘에 이르다, 영이정

남쪽으로 흐르던 물이 급히 서쪽으로 몸을 트는 물굽이의 절벽 위에 정자 하나 올라 있다. 영이정(詠而亭). 마을의 안산인 성황산을 동쪽에 두고 청운하천과 월구들을 내려다본다. ‘영이’란 ‘때(時)와 형세(勢)를 알고 소요자재(逍遙自在)함’을 뜻하는데, 평해황씨 청송 입향조인 황덕필(黃德弼)선생의 자호(自號)다. 선생은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낙향했다가 중종 때에 청운리로 들어왔다고 한다. 영이정은 1734년(영조 15) 마을의 한가운데 창건되었다가 이후 세월이 흘러 붕괴되어 1945년 지금의 장소로 이건했다. ‘영이정이건기’를 보면 ‘바위를 끊어 대로하고 쌓아서 방정하게 하고 기와를 옛것을 쓴 것은 오래된 물건을 잊지 아니하기 위함이요 헌영(軒楹)과 기둥은 새롭게 하여 살펴보니 진실로 아름답다’고 했다.


청운리 부채꼴 모양의 너르고 비옥한 땅
물굽이 절벽 위에 앉은 영이정과 파서정
황학이 강학하던 자리에 지은 만취서당
마을 불빛이 별빛처럼 보인다는 만취정
자연과 조화 이루며 취동팔경 즐기던 곳



절벽 위에는 개망초와 엉겅퀴가 흐드러졌다. 그 속에 일직선의 시멘트 길이 나 있다. 길가에 영조 때의 효자 황취근의 쌍효각(雙孝閣)이 먼저 낮게 서 있고, 길 끝 흙돌담 가운데 협문이 열려 있다. 영이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에는 둥근 기둥으로 권위를 세웠고, 가운데 2칸은 대청으로 열고, 양쪽에는 1칸X1.5칸 규모의 방을 두었다. 방의 전면에는 툇마루를, 측면에는 쪽마루를 놓았다. 오른쪽 방에는 ‘풍평(風平)’, 왼쪽 방에는 ‘욕평(浴平)’이란 이름을 걸었다. 후면에는 벼락닫이창을 내었다. 글 읽다 졸던 선비가 바람에 창이 쾅 닫히는 소리에 퍼뜩 깨어나 무안해 하는 상상을 한다.

대청에 들면 활기찬 곡선에 둘러싸인다. 나무의 곡진 몸매가 그대로 집의 뼈대가 되어 있다. 벽에는 ‘취동팔경’ 각자판이 걸려 있다. 지금의 영이정은 2009년 3월에 증축한 것으로 뜻을 모은 문중사람들의 이름이 비에 새겨져 있다. 대개가 새로운 모습이나 이곳으로 처음 터를 옮기고 쓴 ‘이건기’ 목판은 오래된 모습이다. 마당을 거닐며 본다. 절벽에서 자라난 아카시아가 강물을 샘으로 열어 놓는데, 하얀 머릿수건을 쓴 여인이 얕은 물에 젖어 다슬기를 잡고 있다. ‘고만어화(菰灣漁火)’와 ‘벽암조수(霹巖釣)’가 또한 이와 같지 않겠는가.

마당에는 시멘트를 깔았다. 실 같은 금이 졌고, 그 틈을 비집고 몇 포기 풀이 자랐다. 촌에서 마당은 노동의 공간이고 시멘트 마당은 곧 편리를 뜻한다. 영이정 시멘트 마당을 타박할 마음이 없다. 긴 시간을 이어온 과정에는 보존과 첨삭이 내재되어 있고,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서로 시대의 간극을 두고 떨어져 있다. 사람도 땅도 풀도 저마다 최선을 다한다. 공간은 시간을, 시간은 공간을 체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2. 서녘 낙조에 아취를 더하다, 파서정

마을을 기준으로 청운하천의 동쪽 물굽이에 영이정이 있다면 서쪽 물굽이에 파서정(巴西亭)이 있다. 서쪽으로 향하던 천이 다시 남쪽으로 홱 방향을 바꾸는 자리다. 파서정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옛날 ‘덕이 빛나고 풍속을 바르게 고치고 이름을 감추고 자취를 감추어 길이 은둔(隱遁)하여 유유자적하며 도를 즐기었던’ 가의대부 황정필(黃廷必)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를 기려 정자를 세우고 ‘파서정’이라 편액했다 한다. 파서정은 영이정과 비슷한 구조이나 측면 2칸의 너비가 다르다. 공포는 한결 화려하고 대청에는 문을 달았는데 대청문 인방위에 꽃을 새긴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뜰에는 들꽃이 무성한데 그 너머로 천과 들과 성황산과 남쪽으로 흐르는 장대한 능선들이 모두 한눈이다.

천변에 내려서 바라보면 파서정의 풍취는 더욱 높다. 벼랑 아래로 포항 방향의 도로가 놓여 있어 하천과 동떨어진 듯도 하나, ‘파서정기’에 ‘비처럼 쏟아지는 바위의 긴 다리가 가마소에 새로 놓여 병풍과 장막 같이 둘러있어서 영롱하기가 거울 같고 큰 강이 그 아래 흐르고…봉수(烽燧)와 성대(星臺)가 그 뒤에 팔짱끼듯 하고’라는 멋진 표현이 저 벼랑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한다. ‘취동팔경’의 ‘부연모하(釜淵暮霞)’와 ‘봉산낙조(烽山落照)’는 바로 이곳이 아닐는지.

#3. 흠모하고 흠모하다, 만취정과 만취서당

‘청운리에 진실로 학문이 높은 선비가 있다’는 흠모의 소문은 오래되었다. 그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만취동(晩翠洞) 황학(黃)이다. 선생은 평생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겨 마을을 ‘취동(翠洞)’이라 불렀다. ‘취동팔경’의 ‘취동’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26년 뒤인 1830년 후손 황대손이 황학이 강학하던 곳에 만취서당(晩翠書堂)을 지었고 그 후 1847년 다시 뜻을 모아 만취정(晩翠亭)을 세웠다.

서당과 정자는 서로 마주본다. 만취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마을의 제일 위쪽에 자리한다. 작은 건물이 고매하게 오뚝한데, 서당을 기점으로 마을은 부챗살을 편다. 만취정 역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성황산 중턱에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그곳에서도 마을의 부챗살 모양은 확연하다. 모두의 기문에 ‘서쪽 해 지면 마을 등잔불이 점점이 점철되면 별이 가득 벌려 있는 듯하다’는 표현이 있다. 찬연한 찬미다.

만취정은 접근하기 어렵다.

“예전에는 아주 커다란 나무가 만취정 앞에 우뚝해 잡목들이 자라지 못했어. 언젠가 그 나무를 베어버렸고, 이후 잡목들이 자라나 정자를 감춰 버렸지. 강 건너 오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물이 너무 깊어. 멀리 돌아 산 사면을 타고 갈 수는 있지만 너무 위험해.”

동네 어르신의 말씀이다. 평해황씨 27세손인 황간모의 시에도 ‘좁은 숲 길 따라 소나무 검은 그늘 음지 아래 푸른빛을 밟으며 겨우 찾아 왔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닿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멀리서만 흠모할 뿐이다.

#4. 은(隱)의 불행은 언덕의 행이다, 동은정

성황산의 동쪽사면은 마을의 입구라 수구너미라 부른다. 파서정 아래서 남쪽으로 향한 청운하천이 곧 다시 동류해 수구너미를 가로지른다. 천변은 고만들이다. ‘취동팔경’의 ‘고만천’이 이곳의 용전천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왕산으로 가는 도로 가까운 산자락에 동은정(東隱亭)이 있다. 이곳에 ‘자취를 감추고 참다운 의취를 얻어서 인과 지로 즐기고 늘그막에는 물고기와 새를 벗하며 살았다’는 이가 있다. 그는 ‘휘(諱)는 도철(道喆), 자(字)는 중길(重吉), 호는 동은이라, 호로써 동은정을 세웠다’ 한다.

높은 계단 위에 문이 열려 있다. 계단 아래 양쪽에는 18세기 사람 황태징의 창효각(彰孝閣)과 19세기 사람 황하흠의 정효각(旌孝閣)이 듬직하게 파수한다. 대문은 널판문이다. 꽃받침을 가진 광두정이 조르라니 장식되어 곰살갑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구조로 전면은 둥근 기둥이다. 가운데 대청방을 두고 오른쪽 방은 이락당(二樂堂), 왼쪽 방은 삼성헌(三省軒)이라 이름 붙였다. 대청 광창에 반투명 무늬유리가 그리 오래지 않은 은은한 멋을 풍긴다. 기문을 쓴 황공의 후손은 ‘공이 숨어 사는 불행이 이 언덕의 행’이라 했다. 은근한 낮춤의 언사가 이곳의 정취를 은근히 높인다.

청운리의 누정건축은 자연과 건축의 조화를 넘어서, 자연의 경지에 이른 인문세계를 더해 자연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별서정원’이나 ‘구곡의 경영’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청운리의 정자들은 그보다 소박하고 무구하며 따뜻하다. 그것은 삶과 동리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 기획 : 청송군

취동팔경(翠洞八景)
제1경 성대신월(星臺新月) : 마을 앞산인 성황산에 초승달이 뜨는 모습
제2경 부연모하(釜淵暮霞) : 마을 앞 용전천의 가마소에 생긴 저녁노을
제3경 은어심담(銀魚深潭) : 마을 앞 은어소에 은어가 노니는 모습
제4경 봉산낙조(烽山落照) : 마을 뒷산으로 해가 지는 광경
제5경 선산초적(仙山樵笛) : 맨드락산에서 버들피리 부는 모습
제6경 월구청탄(月駒淸灘) : 깨끗한 물이 흐르는 월구천의 풍광
제7경 고만어화(菰灣漁火) : 고만천에서 밤에 고기 잡는 광경
제8경 벽암조수(霹巖釣) : 고만천 바위에서 늙은이가 낚시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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