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4> 자리가 전하는 뜻 - 남암정·세덕사·송벽사·송은정·낙금당·농천재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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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2   |  발행일 2017-07-12 제14면   |  수정 2021-06-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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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읍 송생리 외곽 벼랑 위에 위치한 남암정. 벼슬길을 마다하고 후학양성에 주력한 남암 황공(黃公)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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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읍 교리 입구의 언덕과 숲 뒤편에 자리한 송은정. 송은정의 이름은 조선 인조 때 청송에 들어와 은거한 김녕김씨 김확(金確)의 호 ‘송은’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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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읍 남쪽 송생리에 자리잡은 세덕사 전경. 세덕사는 평해황씨 17대조인 부사 황곡(黃鵠) 이하 5대를 봉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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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백씨 집안의 정자 낙금당이 청송읍 거대리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왕 때 벼슬을 한 낙금당 백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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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읍 거대리 한가운데에 위치한 농천재의 모습. 농천재는 청송심씨 휘(諱) 태산(太山)이 직접 지은 재사다.


벼슬 마다하고 후학양성 힘쓴 남암 황공
그가 아끼던 벼랑에 제자들이 정자 지어
인조때 속세와 단절, 한실마을로 온 김확
후손이 지은 송은정 한양 바라보고 있어

평해황씨 17대조 황곡 5대 봉향 세덕사
봉황·용·구름 장식…후손 정성 느껴져

거대리엔 수원백씨 백공 기리는 낙금당
마을 가장 높은곳에서 지금도 반들반들

 

 

건물은 사람들 사이의 이해로 충만된 ‘자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1. 두루 굽어보는 자리, 송생리 세덕사와 송벽사

청송군 청송읍에서 남쪽으로 9㎞쯤 내려오면 주왕산에서 흘러나온 주방천이 용전천과 만나는 그리 넓지 않은 구릉성 평지에 송생리(松生里)가 자리한다. 송생리 북쪽은 뒷들 혹은 후평이라 부르는데, 나지막한 안장산 아래 형성된 자그마한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들이 펼쳐져 있고 좁장한 생송천이 흐른다. 이 마을의 안쪽 조금 높직한 자리에 평해황씨 사당인 세덕사(世德祠)와 만취 황학 선생의 사당인 송벽사(松碧祠)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남향해 서있다. 송생리 전체를 두루 굽어보는 자리다.

세덕사는 평해황씨 17대조인 부사(府使) 황곡(黃鵠) 이하 5대를 봉향하고 있다. ‘세덕사기’에 따르면 시대가 변하고 여러 번의 난리에 자손들이 흩어져 살게 되면서 부사공의 묘소와 관련된 사실들을 알 수 없게 된 것이 큰 근심이었다 한다. 그예 후손들은 의논하고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굽고 모금해 1980년 세덕사를 세웠다. 지금도 매년 청명절에 향사한다.

계단 위에 세덕사 외문(外門)이 담담하게 닫혀있다. 붉은 널판문에 청백의 태극이 그려져 있고 네모난 담이 사당 경역을 감싼다. 외문을 열면 사당의 중문을 마주본다. 세덕사는 정면 3칸 겹처마 맞배지붕에 2익공 건물로 단청이 화려하다. 보머리에는 날카로운 눈매의 봉황이 올라 있고 정각 모퉁이의 보마구리에는 용이 지키고 있다. 창방 위 심벽 가운데 초각한 화반 위에는 구름 덩어리 모양의 운공이 처마를 가볍게 띄우며 올라있다. 송구의 정성일까, 수고를 아끼지 않은 성심의 장식들이다.

송벽사는 3칸 홑처마 맞배지붕에 단순한 직절익공 건물로 정숙하고 검박한 조형미를 가졌다. 청운리 사람인 황공의 사당이 송생리에 자리하는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세덕사기’에 나오는 ‘우리 황씨의 근원이 황학 처사’라는 글을 통해 적이 납득할 수 있다. 황공의 후손들이 지은 ‘만취서당기’에는 선생이 1804년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이 멀지 않은 자리에 사당을 지어 향사했고 누구도 그것을 과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송생리 뒷골의 두 사당은 사람들 사이의 충만한 이해와 공감을 표현한 구체적인 결과다. 또한 그것은 삶과 시대정신의 기반을 살아있는 규범으로 만든 인간의 노력이다.



#2.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송생리 남암정

송생리에서 가장 남쪽에 부동면에 접한 작은 동리가 있다. 오밀조밀 모인 몇 채의 집들과도 살짝 떨어진 후미진 곳에 언덕진 땅이 있는데, 놀랍게도 아래에는 못을 가진 벼랑이다. 그 위에 남쪽을 바라보며 앉은 정자가 있다. 남암정(南亭)이다. 남쪽을 향해 선 벼랑이라 남암이라 했을까. 못 가에서 올려다보면 생각은 확신에 가까워진다. 못은 제멋대로 우거진 수풀에 대부분 가려져 있지만 반짝이는 물의 기미는 매우 깊다. 벼랑은 잡목들에 휩싸여 있지만 냉랭한 돌 빛은 문득문득 번뜩인다. 그 위에서 정면 세 칸 남암정은 팔작지붕을 가뿐히 이고 서있다. 벼랑 끝에 걸린 마루의 난간이 반듯하고 든든하다. 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살랑거리는 물고기들 속에 제 얼굴이 일렁였을 것이다.

옛날 남암 황공(黃公)이란 분이 계셨다. 그리 넉넉지 않았으나 어릴 때부터 씨족의 큰 어른에게 수학해 성취한 분이셨다. 공은 일찍 과거에 나가려 했지만 세상이 어지러워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후진들을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곳은 마을 서당 서쪽의 벼랑으로 공이 지팡이 짚고 노닐면서 집 지을 곳이라며 사랑하고 아낀 자리였다.

공이 돌아간 지 100여 년이 되어 갈 즈음,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는 정자를 짓기로 한다. 공의 후손과 당시 수학하던 이들이 각각 약 천의 자금을 모아 마중물 삼았고, 그로부터 몇 십년간을 저축해 결국 남암정을 완성하게 된다. ‘상량문’에는 이와 같은 내역과 함께 원나라 문장가인 조문(趙文)의 노래(唱)가 실려 있다. ‘대목들이 대들보를 동으로 하니 흐르는 물과 세월은 예나 이제나 같도다.’ 이렇게 시작되는 대들보 노래는 동·서·남·북·상·하로 이어지는데,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의 기쁨과 흥이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비스듬한 언덕을 올라 정자의 협문에 닿으면 가슴이 아프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정자는 무척 쇠락한 모습이다. 난간 모서리는 부서졌고 문들은 살대만 남아 허하다. 정자 가로 높은 콘크리트 담을 바짝 세워 둘렀고, 가시철사로 월담을 금지해 놓았다. 언젠가 한 가수는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그것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다’고 노래했다. 옛날 한 사람이 사랑했던 자리와, 그의 사랑이 영세(永世)하기를 바랐던 마음은 그렇게 남았다.



#3. 소나무 사이에 숨다, 교리 한실마을 송은정

청송읍 교리(橋里)는 주왕산 장군봉의 서남쪽 골짜기 아래에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교리에는 교동, 한실, 주솔, 평풍방우 등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그 중 장군봉을 향해 가장 크고, 깊고, 길게 다가가선 가만 적막히 숨죽인 마을이 한실이다. 마을 입구에는 작은 언덕이 솟아있는데 소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사철나무, 느티나무 등이 울창하게 자라 있다. 이 작은 언덕 숲 뒤에 송은정(松隱亭)이 자리한다.

‘송은’이란, 소나무 사이에 숨어 산다는 뜻이다. 인조 때 사람 김녕김씨 김확(金確)은 ‘벼슬한 문벌로 성하지맹(인조가 청에 화의한 일)을 부끄러이 여겨 통곡하며 남쪽으로 내려와 청송에 은거’했는데, 그는 소나무를 심고 그 속에서 살며 스스로 호를 송은이라 했다 한다. 송은정은 훗날 후예들이 그가 살던 곳에 지은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송은정은 북서쪽을 향해 앉아 있다. 직선을 그으면 한양에 닿을 것 같다. 그러나 바라보는 시선은 숲이 가린다.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저녁 빛이 어두워져 서산에 해지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져 서성댄다. 돌아왔노라.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하네’라고 했다. ‘송은정기’는 김공의 뜻이 그와 같은 심사라 이야기한다.

송은정은 최근에 정비해 새것 같은 느낌이지만 편액과 시판들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는 지워지지 않았다. 도연명은 같은 시에서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만 크게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했다. 송은의 뜻이 지금 이 자리에서 아직도 꿋꿋하다.



#4. 뜻이 자리를 이룬다, 거대리 낙금당과 농천재

거대리(巨大里)는 청송읍의 동쪽, 교리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왕산에서 흘러내린 구평천을 따라 취락이 형성되어 있으며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한 곳이다. 중심마을인 거대마을은 남북으로 폭이 좁고 동서로 긴 형상이다. 길에서 마을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데 그 한가운데 청송심씨 휘(諱) 태산(太山)의 재사 농천재(弄泉齋)가 자리한다.

농천은 심공의 호로 그가 살던 마을 앞 소천을 사랑해 스스로 지었다 한다. 농천재는 인근에 공의 묘가 있어 매년 시향을 올릴 때 원근에 사는 자손들이 미리 와 유숙하거나 제사 당일 비나 눈이 내리면 망제행사를 하는 곳이었다. 농천재는 지금 성한 곳이 없다. 마당과 마루는 동네 창고 격이다. 더 이상 재사를 돌볼 자손이 없는 걸까. 자리의 뜻은 소진되었고 자리의 위계는 전락했다.

마을의 동쪽 가장 높은 자리에는 수원백씨 집안의 정자 낙금당(樂琴堂)이 있다. 낙금당 백공은 세종대왕 때 벼슬하던 분으로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낙금당이라는 호를 짓고 은거했다고 한다. 공의 집은 대대로 진안(眞安)에 살았는데 공의 7세손 몽일(夢逸)에 이르러 거대마을로 이거하게 된다. 이후 후손들은 농사 짓고 글 읽으며 번성했다. 선조 임금을 추모하는 마음이 혹여 해이해질까 마을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낙금당을 지었다고 한다.

낙금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가운데 대청을 둔 구조다. 집을 이루는 모든 기둥과 모든 보들이 반들반들 윤이 난다. 기둥은 둥글고 곧으며 보는 꿈틀꿈틀 살아 있던 모습 그대로다. 기단 위에 지게막대기와 싸리 빗자루가 놓여 있다. 측면 문 옆에 장미꽃을 새겨놓은 것은 어느 미장이의 정감어린 마음인가. 뜻이 자리를 이루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공동기획:청송군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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