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7> 옛 이름의 숨은 뜻 - 청송 부남면 화수재, 만우정, 낙은재

  • 박관영
  • |
  • 입력 2017-08-02   |  발행일 2017-08-02 제15면   |  수정 2021-06-21 17:06
한앞에는 功臣집안의 자부심이… 감연리에는 나라 잃은 회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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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남면 대전리에 자리한 화수재. 한앞마을의 입향조 정구 선생을 모신 재실이며 한때 서원으로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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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정은 만우공 심효연이란 인물이 휴양과 강학을 위해 세운 정자로,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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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은재는 조선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낙은 배학순 선생이 1897년에 창건한 정자다. 정자가 자리한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 옥동마을 일원은 흥해배씨 집성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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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은재 현판. 대원군이 하사한 친필 재호를 목판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가끔 옛 이름들에 화들짝 놀라곤 한다. 어떤 것은 솔직하고 담백하다. 어떤 것에는 힘찬 포부와 넓은 이상이 담겨 있다. 또 어떤 것에서는 회한과 성찰을 엿본다. 모든 뜻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갸웃한 이름들은 너무 많고 숨은 속뜻은 너무 깊고 멀다. 그러나 눈과 입에 담긴 이름들은 때로 머리로 이해되고 때로는 가슴이 감응한다. 이름에 대한 이런 좌절과 난데없는 궁리는 부남면 대전리의 한 길가에서 불쑥 솟아났다.


한앞 입향조 정구선생을 모신 화수재
일제시대·전쟁 상처딛고 우뚝 서 있어

역성혁명 반대·낙향한 심원부의 차남
때늦고 어리석다는 뜻의 만우정 지어

흥해배씨 집성촌인 옥동 끝에 닿으면
작은 땅에 숨어 즐거움 간직한 낙은재


#1. ‘한앞’의 화수재

‘한앞’이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마을 입구에 서 있다. 그리고 마을 경로회관 앞에는 그 유래비가 있다. 설명에 의하면 ‘한’은 가장 크고 바른 첫 으뜸, 하나뿐인, 가득 찬, 참 좋은, 제대로란 뜻이고, ‘앞’은 얼굴이고, 바라보는 방향이고, 나아가 추구할 보람이자 체면이자 몫이며, 장래요, 희망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라 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한문자로는 마땅하게 새겨 쓸 수 없는데도 누가 언제부터인지 대전(大前)이라 쓰고 행정명칭으로 굳어 안타까운 마음에 그 유래를 밝힌다’고 했다. 돌에 새겨진 자부심과 분통이 너무나 절절해 또박또박 필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한앞은 지금 부남면소재지가 있는 대전리가 시작된 마을이다. 1589년경 경주정씨 정구(鄭球) 선생이 ‘용전천에 보를 막고 불무산 기슭을 개간해 마을과 앞들을 개척’하고 한앞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밭들과 집들에 둘러싸인 기개당당한 한옥이 우뚝한데 바로 한앞의 입향조 정구 선생을 모신 화수재(花樹齋)다. 화수재 솟을대문 앞에 추모비와 ‘한앞 종실 연혁’을 새긴 비가 있다.

정구 선생은 조선개국일등공신 양경공의 7세손인 고령현감 휘 길(佶)의 현손으로 통정대부 판중추부사를 지낸 분이라 한다. 처음 재실은 1745년에 세워져 서원으로 활용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일본 경찰의 주재소로 쓰였고,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점거했다. 마을 사람들은 1960년부터 퇴락한 재실을 보수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6년 뒤 현재의 건물을 지었다. 건축 당시 ‘안목 높은 도목수가 애써 고른 들보를 홍원리 홍계골에서 일족 150명이 밧줄로 끌어 밤새도록 운반해 와 원근에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화수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은 차분히 내려앉았고 기둥은 모두 둥글고 곧아 염검한 자세다. 기와의 내림새마다 무궁화꽃이 영원처럼 피었고 넓은 마당의 풀은 그제 정리한 모양이다. 화수(花樹)란 무엇일까. 그 뜻은 꽃과 나무인데, 화수재 앞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여물고 풍성한 열매다.



#2. ‘감연리’의 만우정

한앞의 북서쪽에 감연리가 있다. 옛날 마을 입구 쌍바위 밑에 맑은 샘이 있었는데 물맛이 달고 특별히 아이들의 병에 좋아 ‘단물’이라 부른 것이 지금의 감연(甘淵)이다. 마을은 완만하고 긴 골짜기다. 골이 길다 보니 마을의 입구는 ‘아랫마’, 마을의 끝은 ‘끝마’라 부른다. 순정한 이름이다. 아랫마와 끝마 사이 언덕진 동네는 ‘두들마’라 한다. 두들마의 오붓하면서도 은벽한 자리에 정자 하나가 숨은 듯 자리한다. 만우정(晩愚亭)이다.

생각지 않게 너른 땅이다. 공들여 3단으로 다듬은 터에는 가장 아래에 연혁비가 서있고, 그 위에 대문과 담장이 있고, 가장 위에 정자가 서있다. 풀이 수북이 자란 좁은 물길이 터를 휘감고 사과나무 밭이 베일처럼 눈 아래에 펼쳐져 정자는 그 너머 맞은편의 푸른 산과 대면한다. 키 높은 현대의 지붕 몇 개가 보이지 않았다면 심산의 독야(獨也)처럼 고적했을 것이다.

만우 심효연(沈孝淵)은 고려 말(1391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등을 돌리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악은공(岳隱公) 심원부(沈元符)의 차남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만우공 심효연은 1448년(연혁비에는 1488년으로 새겨져 있다)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청천군의 봉을 받고 고향인 덕천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선생은 고향마을에 휴양과 강학을 위한 정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최초의 만우정이다. 이후 만우공의 5세손인 사천현감 심호가 임진왜란 이후 낙향해 덕천에서 감연으로 터전을 옮겼고, 후손들이 번창해 1804년 지금의 자리로 만우정을 옮겨 세웠다. 현재의 만우정은 1997년 문중에서 다시 중수한 것이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두 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있다.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설치했고, 측면과 뒷면에는 쪽마루를 둘렀다. 대청에는 여러 시판들과 정갈한 글씨체로 새겨진 ‘만우정기’가 걸려 있다. 지붕에는 무궁화꽃이 피었고 봉황이 난다. 대문과 짧은 담장은 현대의 것으로 보인다. 막지 않았으나 막은 담장이고, 닫았으나 열린 문이니, 그것은 용(用)이라기보다는 질서나 규범이라 해야 할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정으로써 동을 이끄는 선이 회화적인 변화와 균형을 느끼게 한다.

만우(晩愚)란 때늦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만우공이 왜 관직을 버렸는지, 왜 호를 만우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라도 망하고 임금도 잃었으니 너희들은 조상이 묻혀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시조선산(始祖先山)을 지키며 살아가라’던 악은공의 유훈을 되짚어 어렴풋한 짐작만을 할 뿐이다. 고향에 돌아온 만우공은 오직 음덕을 쌓고 후진을 양성했다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후손이 번연하여 수백호의 집성촌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3. ‘옥동’의 낙은재

감연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오르면 부남면과 부동면의 경계부에 옥동이 있다. 귀한 구슬 옥(玉)자의 옥동은 감연리에 속한 작은 부락으로 나지막한 산줄기가 바짝 둘러선 작은 골에 실 같은 개천이 흐르는 조막만 한 땅이다. 그러나 마을 앞으로 용전천이 가깝고 하늘 맑은 날이면 먼 주왕산을 마을 앞까지 끌어당기는 활연함이 있다. 그래서인지 옥동은 이름이라기보다 하나의 집약된 힘처럼 느껴진다.

옥동은 흥해배씨의 집성촌이다. 고려 말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내다가 망국 후 모든 벼슬을 거부하고 안동에 은거한 배상지(裵尙志)라는 분이 있다. 공은 집 주변에 백죽(栢竹, 소나무와 대나무)을 심고 백죽당이라 자호했다 한다. 공의 장남은 지평공(持平公) 권(權)으로 그의 후손인 유(維)가 안동에서 청송 옥동으로 터를 옮겼고 이후 자손들이 옥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한다.

옥동길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다닥다닥 붙은 몇몇 집들을 지나 금세 마을의 끝에 닿는다. 거기 골짜기가 열리고 산줄기가 내려앉은 삼각형의 땅에 작은 정자 낙은재(樂隱齋)가 있다. 조선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낙은 배학순(裵舜) 선생이 1897년에 창건한 정자다. 현판은 ‘낙은정’으로 대원군이 하사한 친필 재호(齋號)를 목판 한 것이라 한다.

대문은 창화문(唱和門)이다. 부르고 답한다는 굵고 근엄한 획 속에 다정함이 스며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검박한 규모다. 가운데 대청을 열고 양쪽에 작은 방을 두었으며 방 앞에는 반 칸보다 좁은 툇마루가 대청과 연결되어 있다. 대청마루 난간의 가운데가 트여 있는데 툇마루의 옆에도 벽을 세우고 문을 달아 놓았다. 정면으로 성큼 오를 수도 있지만 일부러 옆으로 돌아 몸을 작게 만들고 고개 숙여 오르게 한다. 왼쪽 방 옆에는 한 뼘 쪽마루가 놓여 있다. 마루에 앉아 산을 바라보면 몇 그루 대나무가 쓰윽 몸을 기울여 시선을 맞춘다. 방 뒤쪽에는 서책의 너비만 한 벽장이 달려 있다. 무릎을 굽히고 모로 눕더라도 책은 바르게 놓여야 한다는 마음일까.

낙은재는 골짜기의 작은 땅에 맞춤한 듯이 작다. 그래서 낙은재는 자신의 만유 속에서 결코 작지 않다.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이 지은 기문을 보면 낙은(樂隱)이란 산을 베개하고 문을 닫고 숨는 즐거움이라 했다. 기문의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고종황제 34년(1897)’이란 시대를 본다. 어쩌면 그 시대의 낙은이란 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맞춤한 듯 꼭 맞아 꽁꽁 마음을 숨긴 탈.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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