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8> 근원을 이어가는 집 - 청송 부남면의 익야정과 모의재, 그리고 양계정과 경암재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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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09   |  발행일 2017-08-09 제14면   |  수정 2021-06-21 17:07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숨어든 땅… 가문의 정신적 지주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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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남면 대전리에 자리한 익야정은 공조참의 심순을 추모하기 위해 1760년 지은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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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했던 모의 심공을 모신 재실이다. 심공은 25세 때 탄금대 전투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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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남면 양숙리에 자리한 양계정은 생육신 이맹전의 후손인 양계공 이태신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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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숙리의 자연 부락인 새말에 양계공 이태신과 부친 이여해를 모신 경암재가 자리하고 있다.

 

심장에 한 가지 확고한 뜻을 지녔던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잘 지켜나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역성혁명을 인정할 수 없었던 악은 심원부(岳隱 沈元符)와 계유정난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이 그러했다. 그 뜻을 근원으로 삼은 후손들은, 그들의 근원을 가장 잘 이어나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 터를 잡았을 것이다. 청송의 남쪽 부남면에 그들의 마을이 있다.

#1. 날개 계곡의 익야정과 모의재

청송 부남면의 북쪽 용전천의 서쪽에 나실마을이 있다. 540m 정도의 낮은 능선으로 둘러싸인 사발처럼 오목한 분지다. 나실이란 ‘익곡(翼谷)’, 즉 ‘날개모양의 골짜기’를 뜻한다. 옛 사람들은 ‘나아실’이라고 길게 활공하듯 불렀다. 마을을 둘러싼 능선들이 그 땅을 연모하여 겨울에도 바람이 잠자는 따스하고 뽀송한 곳이라 한다.

마을 초입의 시무나무 숲을 지나 깊은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려온 실개천이 용전천과 합류하는 곳에 마을 입구가 있다. 용이 꿈틀대는 듯한 동북 봉우리의 기슭과 멀리 매봉이 날아드는 동남 언덕의 기슭이 근접해 스스로 이룬 동문(洞門)이다. 문은 마을을 비호하는 거대한 느티나무들로 인해 짙고 서늘한 그늘에 싸여있다. 나무들에게 ‘잠시 다녀갑니다’ 하고 인사를 올려야 할 것 같은 기운이 감돈다. 실개천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곧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서있는 정자를 만나게 된다. 동리의 문을 지켜보며 남동쪽을 향해 오뚝하게 서있는 정자, 익야정(翼也亭)이다.


역성혁명 반대 심원부 집안
부남면 날개모양 골짜기 나실마을
심순 기리는 문인들이 지은 익야정
팔작지붕이 날아가 하늘에 닿을 듯

임란 때 전사한 심공 모신 모의재
세월 흘러도 그 뜻 오롯이 전해져


생육신 이맹전 집안
이맹전 9세손 이태신 추모 양계정
진흙에서 피어난다는 연꽃 새겨져

산기슭 양지바른 곳이라는 양숙리
조상 뜻 기리는 벽진이씨 모여살아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로 팔작지붕이 처연한 듯 혹은 날아갈 듯 멋스럽다. 양쪽에 방이 있고 가운데와 전면은 마루로 열어 계자 난간을 둘렀다. 정면의 아래 기둥은 팔각이고 위 기둥은 둥글다. 공포엔 구름문양이 새겨져 있고 마루엔 고아하게 곡진 도리가 걸쳐져 있다. 작은 대문 앞에 ‘2003년 중건 모금 비석’이 있는데 ‘익야정은 심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익야정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 심순(沈淳)을 추모해 1760년 후손과 문도들의 후예가 지은 정자다. 심순은 악은 심원부의 차남인 만우 심효연의 후손으로 자는 군후, 호는 송헌(松軒)이다. 그는 문학과 필법이 뛰어났고 평생 나실에 숨어 살면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전한다. 익야정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문인들의 계원은 수백 명에 달했으며 그들은 심순의 글을 숭상하고 섬김과 나눔의 얼을 귀히 여겼다고 한다.

익야정 이름과 기문은 응천 박규진이 지었다. 기문에는 송나라 철학자 장재(張載)의 시 ‘서명(西銘)’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아마 ‘천명을 보존해 가는 것은 하늘의 자식으로 하늘의 도리를 다하는 것(子時保之子之翼也)’이라는 구절이 아닐까 한다. 또한 골짜기의 이름과도 부합하니 ‘익야’는 하늘에 닿고 땅을 아우른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 가에 화사한 꽃 화분들이 놓여 있다. 저절로 미소짓게 하는 소소한 정겨움이다. 잠시 후 광장처럼 넓은 터가 열린다. 하늘만 담긴 샘처럼 아늑하고 정결한 마을의 중심부다. 터의 가장자리에 마을 ‘모정’이 자리하고 그 뒤에 약간 높직한 담으로 감춰진 모의재(募義齋)가 있다. 녹슨 철 대문 앞 양쪽에 화단이 깔끔한데, 대문 안 모의재는 낡고 조금은 방치된 듯한 모습이다.

모의재는 악은 심원부의 7세손인 모의 심공을 모신 재실이다. 자는 정연(淨然), 휘는 정(汀)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문경 마포(麻浦)에서 각 군의 의병과 합세하여 신립(申砬) 장군 진에 나아가 수많은 적을 섬멸했던 인물이다. 안타깝게도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는데 그때 나이 25세였다.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의복과 신발로 장례를 지냈으며 부인 아산(牙山) 장씨(蔣氏)도 따라 순절했다고 전한다.

모의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전면은 장마루, 후면은 방이다. 팔작지붕은 고기와형 강판으로 보수되어 있다. 중건 당시에는 주사도 갖추고 재실과 서당의 기능을 함께했다고 한다. 건물은 쇠락했으나 강직한 모의재 현판 아래서 바라보는 나실곡은 아름답고 안온하다. 남쪽에는 절재의 낮은 산봉이 재실을 향하여 머리를 읍하고 서북 장등은 굽이굽이 돌아 재실을 옹호한다.

심공은 전장에 나아갈 적에 ‘내가 충훈의 집 후예로서 비록 벼슬을 못한 선비의 신분이나 마땅히 힘을 다하여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리라’ 했다. 악은의 후손인 심공의 의는 대의다. 의란, 모든 경계의 피안에 있는 커다란 뜻이다. 세월이 흘러 집은 퇴락하였으나 그 뜻을 근본으로 삼은 이는 나실곡의 심장부에 여전히 자리한다.

#2. 양지바른 땅의 양계정과 경암재

나실마을에서 남쪽으로 정결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몇몇의 마을을 지나 부남면 양숙리(陽宿里)에 닿는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양숙리다. 조용한 마을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산(葛山) 기슭 중봉 아래 오수처럼 앉은 정자 양계정(陽溪亭)이 있다. 주변으로 논밭이 꽤 넓게 펼쳐진 양지바른 곳이다.

양계정은 생육신 경은 이맹전의 9세손인 양계공(陽溪公) 이태신(李泰新)을 추모해 지은 정자다. 양계공의 아버지 이여해(李如海)는 1596년에 영천에서 출생해 조부인 대암 이희백에게 수학하였는데 숨어 살면서도 몸가짐이 맑고 검소하여 사우들이 받들어 중히 여긴 인물이었다. 이여해는 만년에 가솔들을 이끌고 청송 양숙으로 이거했는데 별세하기 전 넷째아들인 양계공 태신에게 종가의 보전을 명했다. 양계공은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효자였고, 비범했으며, 글씨는 용이 날아가는 듯했다고 전해진다.

맞배지붕을 올린 한 칸 대문은 고방(庫房)이 있어 약간 넓다. 대문 막새에 국화가 피었고 봉황이 난다. 양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1964년(단기 4297년)에 상량했다. 모든 기둥이 둥글고 공포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누마루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는데, 난간의 다리 머리에도 연꽃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후손들은 진흙 속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피어나는 연꽃이 양계공과 같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양숙리의 자연 부락인 새말에는 양계공 이태신과 부친 이여해를 모신 경암재(景巖齋)가 있다. 양숙마을에서 용전천을 건너 맞은편, 자그마한 마을의 가장 안쪽에 낮은 산을 등지고 마을을 내다보는 자리다. 문 앞은 묵정밭으로 보이는데 수풀이 무성하다. 풀을 헤치고 협문을 들어서면 콘크리트 벽돌로 쌓아올린 담장이 경암재에 바짝 가까워 경암재가 한 뼘 거리다. 재실은 정면 4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콘크리트 기단 위에 서있다. 둥근 수막새에는 무궁화가, 망새와 귀면기와에는 큰 대(大)자가 새겨져 있다. 기단 위에 서면, 담장 너머로 마을의 논밭과 먼 산이 보인다. 마당은 여유가 없지만 경암재의 시선은 넓고 멀다.

경암재는 후손들이 의논하고 힘을 합해 종중의 소나무를 팔아 세웠다 한다. 경암재라 편액한 것은 지명을 따라서라는데, 새말과 경암의 관계는 알지 못한다. 다만 빛바위라는 경암의 뜻이 참으로 맑고 곧다. 경은 이맹전은 영천으로 들어간 뒤 빗장을 걸고 평생 나오지 않았다는데, 이후 직계 후손들은 중앙 정계에 나가지 않고 선비의 명맥을 이었다 한다. 종가의 보전을 명하고, 종가의 보전을 책임으로 삼은 이여해와 이태신 부자가 바로 그들이었다. 지금도 깊으나 환한 양숙리에는 그들의 후손인 벽진이씨(碧珍李氏)가 모여 산다. 땅은 조상들의 뜻으로 가득 차 있고, 후손들로 인해 언제나 부활하고, 지켜지고, 이어진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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