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9> 다함이 없는 강물처럼 - 청송 현동면 추모정, 동암정, 경모정, 일송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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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6   |  발행일 2017-08-16 제15면   |  수정 2021-06-21 17:11
품위있는 가문의 뜻, 저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역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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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현동면 인지리에는 함안조씨(咸安趙氏) 신당(新堂) 조수도(趙守道)를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정이 자리하고 있다. 병보천변 경사지에 자리해 마을길과 물길을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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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은 조선 말기 의병항쟁에 나선 일송 조규명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은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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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정은 망운(望雲) 조지(趙址)의 증손인 조시구(趙時玖)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야학(夜學)이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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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정은 망운 조지의 증손인 동암공이 평소 노닐던 자리에 지은 정자다.

 

청송군 현동면 소재지인 도평리 하늘에는 늘씬한 다리의 수로가 근사하게 걸려있다. 물은 흐를까, 물은 어디에서 어디로 갈까 알지도 못하면서, 어쩐지 수로를 볼 때마다 함박 웃게 된다. 현동면에는 길안천의 지류인 병보천이 남북으로 흐르는데 도평리 북쪽의 천변에 면에서 가장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어쩌면 들을 살리는 그곳 병보천으로부터 물은 수로를 타고 또 다른 곳으로 가는 건지도 모른다. 옛날,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 선생은 ‘강물이 다하면 자손이 없어지리라’ 하셨다. ‘강물은 결코 다함이 없다’는 뜻인가 싶다가도, 21세기를 사는 마음으로는 보존(保存)과 보전(保傳)의 의미를 더하지 않을 수 없다.

생육신 어계 조려선생의 후손
신당 조수도와 그의 두 형제들
임란 때 나라지키고 가문 보전
병보천변에 그 뜻 새긴 추모정

조수도의 동생 순도의 11세손
일송 조규명과 그의 아들 후송
1835년·1907년 의병항쟁 동참
산 중턱엔 일송이 지냈던 정자
현동에 학교 세우고, 또 기부…
의로운 뜻 흐르고 또 흐르는 듯

#1. 지켜 보전한 이를 기리는 집, 추모정

도평리의 북쪽은 인지리(印支里)다. 300여 년 전 함안조씨(咸安趙氏) 신당(新堂) 조수도(趙守道)가 이주해 개척한 마을이다. 신당은 생육신 어계 조려의 현손인 망운(望雲) 조지(趙址)의 장자로 청송 안덕에서 이곳으로 갈라져 나와 처음에는 지거동(支居洞)이라 했다. 이후 천변에 도장 모양의 바위가 있어 도장 인(印) 자와 원래 이름의 지(支) 자를 합해 인지동이 되었다.

신당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인지리의 가장 위쪽인 손달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수령 300년 된 느티나무가 정정하게 품고 있다. 신당의 자는 경직(景直)으로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총명하며 효성이 지극했다. 스승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는 ‘(신당) 조수도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여 이미 학문을 성취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신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인 조형도(趙亨道)와 조동도(趙東道)를 곽재우 장군 휘하의 의병으로 보내고 노부를 모시고 가문을 지켰다. 또 함안으로 가 집안 사람들을 피란시켜 화를 면하게 했다고 한다. 시대의 운명 때문인지 장자의 무게 때문인지 이후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근래에 깔끔하게 세운 손달 경로당과 쉼터가 있는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곧 길 아래로 천변의 경사지에 자리한 정자의 지붕이 보인다. 신당을 기려 세운 추모정(追慕亭)이다. 수목의 청량한 그늘에 싸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등불처럼 환한 배롱나무 꽃이 협문을 안내하고 곁에는 1999년에 중건된 기념비가 높직이 자리한다.

유려하고 착하게 굽이진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자 훤칠하게 선 추모정이 보인다. 전면 4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앞쪽 1.5칸은 회랑과 같은 마루에 계자난간을 둘렀고 가운데 두 칸은 미서기문을 달았다. 공포조각 위 닭 형상의 보머리 장식이 특이하다. 마루에 오르면 마을을 향해 오르는 길과 유유히 흐르는 물이 보인다. 마을 앞 쉼터에 모여 앉은 노인들의 음성이 오순도순 들려온다. 문득, 신당이 곁에 앉아 이 소리들을 함께 듣는 듯하다.



#2. 욕심 없이 제 할 바를 다한 집, 동암정

손달마을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인지리 부곡마을이다. 동리에서 조금 떨어진 밭 사이에 조금은 퇴락한 3칸 정자 동암정(東庵亭)이 고적하게 자리한다. 남쪽에서부터 달려온 보현산 줄기가 정자의 배면을 부드럽게 감싸고 눈앞에는 현동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병보천은 저 너른 평야의 가운데를 낮게 흐른다.

편액의 동암(東庵)은 함안조씨 휘(諱) 시번(時)의 호다. 동암은 망운(望雲) 조지(趙址)의 증손으로 일찍 문사를 성취하고 효성과 우애가 특히 깊었다고 한다. 또한 농사 짓고 과원 살피는 일을 한가로운 사업으로 여기고 진실로 자연을 즐기는 일을 천명으로 삼은, 숨어 살아도 근심 없는 군자였다고 전한다.

정자는 동암이 평소 노닐던 자리에 지었다. 정면 3칸에 측면은 2칸의 소박한 건물로 중당에서는 강학하고 양측 방에서는 벗들과 마주했다. 늘그막에 동암은 지팡이 짚고 이곳에 올라 오랜 지기들과 두어 밤 머물며 고기 잡고 술 마시곤 했다 한다. 사람 좋은 주름진 얼굴의 그를 상상하게 만드는 정자다. 옆 사과밭에서 일하던 노인이 싱긋 웃으신다. 그 미소 속에 동암이 겹쳐진다.



#3. 먼 곳을 바라보는 집, 경모정

동암정에서 들판과 천을 훌쩍 뛰어넘으면 창양리(昌陽里)다. 현동면에서 제일 먼저 햇빛이 비추는 곳이라서 창양이다. 마을 깊숙한 곳에 원창마을이 있다. 대문이 보이지 않고, 집집마다 과일나무와 꽃나무가 정성이어서 골목길 걷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마을이다. 마을의 가장 안쪽에 경로당과 모정과 경모정(敬慕亭)이 나란히 자리한다. 경모정은 망운 조지의 증손인 조시구(趙時玖)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현동면의 주사(主事)였던 안겸두(安兼斗)가 이곳에서 야학(夜學)을 열었다고 한다.

경모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열고 양쪽에 방을 두었는데 오른쪽 방을 앞으로 반 칸 정도 내어 더 크게 지었다. 그래서 양쪽 방의 정면 툇마루 크기가 다르고 기둥도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좌우 측면에는 쪽마루가 있다. 보통 쪽마루는 작은 동바리 기둥으로 지지되어 건물에 부착된 독립적인 성격을 보이는데, 경모정의 쪽마루는 굵은 바깥 기둥과 방 사이에 놓여 툇마루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쪽마루와 크기가 다른 방으로 인해 무려 18개의 기둥이 경모정을 구성하고 있다. 기둥이 많다 보니 기둥과 보가 만나는 곳을 보강해주는 보아지도 다양하게 많아서 오밀조밀하고 다채롭다.

경모정은 높은 기단 위에 올라서서 먼 곳을 바라본다. 후진을 양성하는 일 또한 먼 내일을 바라보는 일일 게다. 경모정과 동암정은 서로 마주 본다. 망운의 두 증손은 멀찍이서 든든했을 것 같다. 두 물길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도 그 원류는 하나이므로….

#4. 따르고 따르는 집, 일송정

원창마을의 남쪽은 신창마을이다. 한길 가 거대한 능수버들이 과객을 매혹하고 일제강점기에 후송(後松) 조용정(趙鏞正)이 지었다는 후송당(後松堂)의 긴 담장이 발길을 잡아끄는 바로 그 마을이다. 입구에 서면 왼쪽 숲속에 효자각이 보이고 후송당 뒤편의 낮은 산중턱에 한 정자의 자태가 언뜻 보인다. 모두 일송(逸松) 조규명(趙圭明)을 기리는 것들이다.

일송은 망운 조지의 셋째 아들인 남포(南浦) 조순도(趙純道)의 11세손으로 후송 조용정의 아버지다. 그는 1801년 인심 좋기로 소문났던 조성욱(趙性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마을 노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전 생애를 관통하는 선생의 효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다 할 수가 없다.

산 중턱에 숨은 듯이 일송정(逸松亭)이 자리하고 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원시림처럼 수풀이 우거져 있지만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는 미혹한 길이다. 10여m의 길을 홀린 듯 오르면 동그마한 햇살이 눈부시게 열리고 하늘을 향해 잎을 세운 측백나무가 파수꾼처럼 길을 막는다. 측백나무를 빙그르 돌아서서야 한 뼘 양지 속에 고요히 앉은 일송정과 마주한다. 일송정은 기역 자 툇마루를 앞에 두고 2칸 장방, 중방, 1칸 장방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누각이다. 툇마루 아래에는 짧고 낮은 담장이 있다. 담장은 정자의 내외를 선언하고, 걸음을 이끌고, 가까운 시선을 차단하고, 시선을 멀리로 보낸다.

일송정은 아들 후송이 아버지 일송을 위해 지은 정자다. 일송은 1835년 함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고종의 의병 해산령에 따라 돌아와 일생 독서하며 일송정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후송 역시 정미년(丁未: 1907년)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에 참여해 의병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후송은 현동에 학교를 세웠고 그의 손자는 부동산 전부를 학교에 기부했다. 일송(逸松)이란, 달아나 숨었다는 슬픈 자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생의 뒤를 따른 후손들 모두가 후송(後松)이다. 떠나는 마을 입구에서 홀연 조용각(趙鏞恪)이라는 분의 송덕 불망비를 발견한다. 그는 1994년 주민들과 힘을 합해 고향 창양리에 길을 닦았다고 적혀 있다. 보존(保存)하고 보전(保傳)된 강물은 결코 다함이 없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공동기획:청송군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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