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2> 언덕 위의 3色 정자 - 청송 현서면의 침류정, 오월헌, 동와정

  • 박관영
  • |
  • 입력 2017-09-06   |  발행일 2017-09-06 제13면   |  수정 2021-06-21 17:14
흐르는 물 베개삼고… 오동나무와 달 벗삼아… 동쪽 움집에 은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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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현서면 월정리에 자리한 침류정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성진이 지은 정자다. 김성진은 임진왜란 이후 이 정자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오른쪽에 정자를 향해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향나무의 가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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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헌은 의성김씨 집안의 서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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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와정은 조선 선조 때 통정대부장악원정을 지낸 동와 김흥서가 세운 정자다.

 

바다 속으로 미광이 비치는 듯한 수목들의 언덕이다. 뒤쪽에는 고모산이 솟아 있고 눈앞에는 어봉산이 가까우며 옆으로는 문봉산 산두봉과 대정산이 감싸고 있다. 언덕 아래에는 길안천이 흐른다. 빠듯한 너비의 천변에는 벼와 사과나무가 애틋하게 풍성하다. 그러한 언덕에 세 채의 정자가 서있다. 침류정(枕流亭), 오월헌(梧月軒), 동와정(東窩亭)이다. 수목과 돌과 천과 들과 산은 이들 정자로 인해 명승이 되고 그들은 허리를 굽혀 자신의 경승을 둘러본다. 푸른 저녁처럼 어두운 수목의 그늘 속에서, 그러나 태양을 향해 가슴을 열고 밝게 안녕의 신호를 보내며….

월정리 여암마을 언덕 위의 침류정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 증손이 건립
물길 가까이서 흐름에 집중하는 듯

침류정 동쪽 의성김씨 서당 오월헌
오동나무와 달빛 이야기만 전해와

선조 때 문신 김흥서가 세운 동와정
견고하면서도 순박한 모습 그대로

 

#1. 계류를 베개로 삼은 정자, 침류정

언덕이 있는 곳은 청송 현서면의 월정리 여암(旅岩)마을이다. 마을 앞 냇가에 큰 바위가 이어져 있는데 그곳에서 쉬어가는 객이 많았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숫제 ‘나그네 바위’다. 언덕은 나그네가 다리쉼했을 법한 바위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길안천으로 쏟아져 내리는 고모산 자락에 돌을 쌓아 단단한 토대를 세우고 평평하게 다듬은 언덕이다. 침류정(枕流亭)은 언덕 위에 편안히 올라서 있지 않고 잿길에 길고 튼튼한 다리를 디디고 서 있다. 조금 더 물길 가까이, 조금 더 흰 바위들에 가까이, 물과 바위의 은밀한 조력에 귀 기울이 듯 서있다.

침류정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성진(金聲振)의 정자다. 그는 의성김씨 청송 입향조인 도곡(道谷) 김한경(金漢卿)의 증손으로 학식이 높고 효성이 깊은 인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들을 전장에 보내고 자신은 노모를 피란시켰으며 난이 지나간 후에 이 정자를 지어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고 한다.

침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뒤쪽 중앙에 1칸 온돌방을 두고 좌우 전면에는 마루를 깔았는데, 전면에만 기둥 밖으로 난간을 두르고 좌우에는 양쪽으로 여는 판문을 내었다. 뒤쪽에는 세 칸 모두에 문을 내었는데 동쪽 마루 칸은 양쪽으로 여는 판문, 서쪽 마루 칸은 한쪽으로 여는 널문, 가운데 방문은 한쪽으로 여는 띠살문이다. 문 앞에는 길고 좁은 쪽마루를 달아 출입을 쉽게 했다. 온돌방에만 네모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둥근 기둥을 세웠고 기둥머리는 연꽃으로, 보머리는 봉황새로 장식했다. 침류정 옆에는 조금 거리를 두고 한 그루 향나무가 서있다. 정자를 지을 때 같이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무는 나이 든 몸을 쇠기둥에 의지해 비스듬히 서 있다.

마루에는 한산(韓山) 이병하(李秉夏)가 1905년에 지은 침류정기(記)가 걸려 있다. 그는 ‘이곳의 풍광 속에서 왜 흐르는 물만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는가를 곰곰 생각했고 술잔에 넘치는 물이 천리를 흘러가며 무궁한 이로움을 주는 것이니, 이 작은 집이 술잔에 넘치는 물의 근원과 같아 오래 갈수록 더욱 많아지고 멀리 갈수록 더욱 빛날 것’이라 했다. 흐름을 이어가는 것, 맑음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침류’의 교훈이라 했다.

가만 얼굴을 바라보면, 침류정은 한없이 아득한 것들과 집중하여 공명하는 눈동자 같다. 그러나 옆모습을 훔쳐보거나 뒷모습을 바라보면, 침류정은 굳어버린 침묵처럼 말 없는 입 같다. 그 침묵과 집중을 지켜주기 위해 늙은 향나무는 한걸음 뚝 떨어져 서있는 걸지도 모른다.



#2. 오동나무와 달의 정자, 오월헌

침류정의 동쪽에 산을 기대고 선 오월헌(梧月軒)이 있다. 의성김씨 집안의 서당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김성진이 침류정과 함께 지은 것인지 그 이후의 것인지 명확한 설명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대연헌(大淵獻), 즉 어느 해년(亥年)에 쓰인 오월헌기(記)에 ‘김씨(金氏)의 서숙(書塾)’이라는 기록이 있고, 또 다르게는 고종 5년인 1868년 2차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된 세덕사(世德祠)의 구재로 건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의 중수 여부를 알 수 없으니 현재의 건물은 1869년경 세워진 것으로 상정한다.

오월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이고 양쪽에는 앞뒤가 1칸 반 규모인 방이 있는데 오른쪽 방에는 강학재(講學齋), 왼쪽 방에는 돈의재(敦誼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전면에는 반 칸의 툇마루가 있는데 양쪽 끝 1칸씩에만 낮고 평평한 난간을 올리고 측면은 판문으로 막았다.

기문은 쌍호거사(雙湖居士) 권별(權)이라는 이가 썼다. 그는 어느 가을날 벗과 함께 오월헌에 올라 정자 주인에게 오월(梧月)의 의미를 물었다고 한다. 그때 오월헌 앞에는 선대(先代)에 심긴 오동나무가 있었다. 주인은 ‘봄과 여름에는 오동나무 그늘이 두텁고 밝은 달빛이 경치를 빛나게 하고, 가을과 겨울이면 오동나무 그림자가 소소하고 서리가 내리는 밤이면 달빛이 밝게 어리니, 이는 조상들의 달빛이 후손에게 비추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오동나무가 혹 시들거나 바람에 부러져도 반드시 그 뿌리에서 싹이 돋아 대대로 가꿀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쌍호거사는 ‘저 땅의 오동나무는 자손의 무성함과 연관하고 저 하늘의 달은 조상의 빛을 띠었다’고 감회했다. 지금 오동나무는 어디에 있나, 이 여름 화사한 연 자줏빛 꽃을 보지 못했는데….

#3. 동쪽의 움집, 동와정

언덕의 가장 동쪽에 동와정(東窩亭)이 자리한다. 동와정은 조선 선조 때 통정대부장악원정(通政大夫掌樂院正)을 지낸 동와(東窩) 김흥서(金興瑞)가 세운 정자다. 그는 이곳에 은거해 후학을 양성하고 성리학을 공부하며 자연과 함께 한 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동와’란 ‘동쪽에 있는 움집’을 뜻한다. 움집, 즉 움푹한 곳은 숨어있기 좋은 곳이겠다.

전쟁을 겪고 세월이 지나면서 동와정은 점차 부서지고 무너졌다. 이후 후손들이 북쪽 산의 나무를 베고 남쪽 시내의 돌을 가져다 재실로 중건했다. 여섯 칸 겹집이었으며, 가운데 2칸은 정당(正堂), 오른쪽 2칸은 학문을 익히는 이업소(肄業所), 왼쪽 2칸은 손님을 대접하는 연빈소(賓所)라 했다. 견고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넓으면서 순박하게, 김흥서의 검소한 덕을 본받아 지었다고 전한다.

동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1칸 대청을 열고 양쪽에 1칸씩의 방을 두었으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길게 놓아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자 곁에는 1998년 중수했다는 작은 비와 곧게 자라난 향나무가 있다. 현재의 동와정은 이전의 중수 기록에서 말하는 검소한 모습과 꼭 닮았다. 동와정은 깃털처럼 검박하고 손바닥에 모은 따뜻한 입김처럼 신중한 모습이다.

동와정기는 후손 김동섭(金東燮)이 썼다. 그는 기문을 통해 이곳의 경치를 보여준다. 봄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빼어나고 무성한 그늘을 땅에 드리운다. 여름에는 구름이 일어나 기이한 봉우리를 만든다. 가을에는 물이 맑고 저녁노을은 따오기와 함께 날며 벼가 무르익어 많은 이들을 살게 한다. 정자의 주인들은 이 모든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후손들도 이 모든 풍경을 본다.
공동기획:청송군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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