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3> 엎드린 듯 낮게, 그리고 고요하게 - 청송 안덕면의 동계정, 오의헌, 송포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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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13   |  발행일 2017-09-13 제13면   |  수정 2021-06-21 17:15
부끄러움과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 살던 곳…德이 성처럼 쌓였다
20170913
청송군 안덕면 덕성리에 자리한 동계정은 생육신 어계 조려의 5세손인 동계 조형도가 지은 정자다. 조형도는 한강 정구에게 수학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 등과 함께 화왕산전투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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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정 인근에 자리한 오의헌은 조형도의 아들인 조함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조함세는 여헌 장현광에게 수학해 학행이 높았으나 벼슬길로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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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포정은 조형도의 동생인 송포 조종악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정면 4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보현산의 북쪽 보현천변에 청송군 안덕면 덕성리(德城里)가 있다. 함안조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라 한다. 천변의 땅은 소나기 같은 햇살에 젖어 양지바르고, 집들은 편안하게 엎드린 듯 낮게 고요하다. 사과밭과 논이 넓게 갈마드는데, 벼들은 꾸벅꾸벅 인사를 전해오고 사과나무들은 훌쩍 발돋움해 저마다 햇볕 따먹기 바쁘다. 도랑 위에 척 걸쳐 앉은 정자에는 검은 머리 흰 머리가 잔잔한 물소리에 잠들었고,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낯선 사람을 향해 한번 컹 조심스레 짖는다. ‘환영합니다’ 길가 담벼락이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해바라기가 피고 잠자리가 줄지어 날고 허수아비가 웃는다. 오가는 이 드문 시골길의 벽화는 숫접게 다정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 조형도
不忠 부끄럽다며 낙향, 동계정 세워
조형도의 아들 함세 기리는 오의헌
다섯 가지 마땅함의 뜻 현판에 새겨
남쪽엔 조종악 忠孝 기리는 송포정

함안조씨가 대대로 살아온 덕성리
세 정자 낮고 고요하게 자리잡아



#1. “충언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다” 동계정

덕성리에는 사부실(沙夫谷)과 덕재(德才), 두 개의 부락이 있다. 사부실은 본래 하천이었는데 큰 홍수로 인해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땅이라 한다. 고모산 줄기가 부드럽게 흐르는 마을의 가장 안쪽에 넉넉한 자리를 마련해 앉은 동계정(東溪亭)이 있다.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5세손이자 망운(望雲) 조지(趙址)의 둘째아들인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의 정자다.

조형도는 어릴 때 큰아버지인 만호(萬戶) 조우(趙)의 양아들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총명하고 영특해 겨우 글자를 배울 만할 때 이미 문장을 지었고, 열 살이 되던 해에 양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른처럼 상례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뒤 3년간 향시에 연이어 장원했고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 등과 함께 화왕산전투에 참가해 크게 활약했다. 이를 계기로 무과에 지원, 급제해 선전관(宣傳官) 겸 비국랑(備局郞)에 임명되었다. 누차 승진해 통정대부에까지 오른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광해군 때다. 인목대비가 폐출되고 영창대군이 살해되자 충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그는 1613년 낙향해 정자를 세우고 동계정이라 했다.

동계정은 정면 4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의 천마산 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양쪽은 방이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옆면과 뒷면 전체에는 쪽마루가 놓여 있다. 대청의 오른쪽에는 사친당(思親堂), 왼쪽에는 연군헌(戀君軒) 편액이 걸려 있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으로 단정하게 구획돼 있고 3칸 대문채가 듬직하다.

원래 정자는 ‘보현산 북쪽 용연의 동쪽’ 혹은 ‘용산 절벽 위’에 있었다고 한다.

“동계정은 예전에 가끔 놀러 갔던 곳이지. 매방들 언덕 위에 있던 정자 말이야. 미술시간에 정자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고 정자 밑은 현남국민학교 자연관찰지로 지정해서 야외수업을 가곤 했지. 그 수심 깊은 물을 용연이라고 불렀어.” 우연히 엿들은 대화로 동계정의 원래 자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부실의 남쪽, 지금은 폐교된 학교 뒤 보현천과 가까운 자리였을 것이다.

낙향한 지 4년 뒤 나라에 도적이 들끓고 반란이 잦아지자 조형도는 다시 중앙으로 나갔다. 인조반정 때는 인조를 호위해 보성군수에 올랐는데 세금을 감면하고 자신의 봉록으로 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이괄의 난 때는 공주로 피신하는 인조를 다시 한 번 호위해 진주와 상주의 영장(營將)으로 제수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70세였다. 급히 군장을 꾸려 적진으로 달려가 선봉에 서기를 청했으나 노령이 염려돼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분개한 나머지 등창이 나 세상을 떠났다 한다.

동계정은 비바람에 낡고 6·25전쟁으로 크게 훼손된 것을 1952년에 중건했고 1976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건했다고 한다. 마당에는 2008년에 중건했다는 비가 있다. 현재 지붕을 천막으로 덮어 놓은 걸 보니 다시 수리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다. 별나게도 대청에 시계가 걸려 있다. 오가는 후손들은 동계정의 시간을 본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멈추지 않는 시간이다.

#2. ‘다섯 가지 마땅함’ 오의헌

동계정 옆에 마치 동계정의 그림자를 멀찍이 따르듯 오의헌(五宜軒)이 있다. 조형도의 아들인 조함세(趙咸世)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그는 어려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했고 학행이 높아 여러 번 침랑(寢郞)에 천거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그가 골짜기에 묻혀서 만년을 보낸 곳이 오의헌 자리다. 동계정의 흰 벽과 짙은 고동색 기둥에 잠시 눈이 익었던지 오의헌의 희끗한 모습은 매우 늙어 보인다. 지붕은 위태로워 보이고 몇몇 창호들은 낡고 삐걱댄다.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오의헌의 골격은 견실하고 탄탄하다.

조함세는 아버지 조형도와 마찬가지로 매우 효자였다 한다. 그가 11세 때 어머니의 몸과 팔다리가 마비돼 수족을 못 쓰게 되자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옷 입고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루지 않았고,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로 어머니를 회생시켰다 한다. 그의 나이 19세에 아버지가 등창이 나자 항상 자신의 입으로 농혈을 빨아냈으며 이후 상을 당했을 때는 피눈물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오의헌은 정면 3칸 측면 반 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마루를 열고 양쪽으로 넉넉한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루 뒷면 가운데에는 유리창이 설치돼 있는데 쓰렁쓰렁한 매무새라기보다는 마을사람들과의 가까운 거리를 느끼게 한다. 오의헌 현판에는 헌의 의미가 함께 적혀 있다. 오의(五宜)란 다섯 가지의 마땅함(宜)이다. 봄에는 바람이 마땅하고, 여름에는 서늘함이 마땅하고, 가을에는 달이 마땅하고, 겨울에는 따스함이 마땅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 주인이 마땅함을 뜻한다.

조함세는 수십 년을 궁벽하게 살았으나 의(義)를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오의헌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 1696년에 건립됐고 이후 1790년에 중건됐다. 그가 기거했던 최초의 집 오의헌의 모습은 알 수 없다. 다만 사계절의 운치를 즐기고 자연의 질서를 높이 여겼으며 그에 맞는 덕을 갖추기를 원했던 한 사람의 거처를 상상해본다. 후손들이 지은 오의헌에는 사모해 높이는 마음이 더해졌을 것이다.



#3. ‘충과 효의 뜻이 오롯이’ 송포정

사부실의 남쪽은 ‘덕재’로 덕성리가 시작된 마을이다. 덕성리의 남쪽은 성재리(聖才里)인데 각각 덕(德)자와 재(才)자를 따서 덕재라 칭했다고 한다. 마을의 한가운데에 송포정(松浦亭)이 있다. 만호 조우의 아들이자 동계 조형도의 동생인 송포(松浦) 조종악(趙宗岳)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그는 겨우 3세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는 공을 세워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지냈고 인조 때는 별시위(別侍衛)가 되었고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송포정은 원래 집들에 휘 둘러싸여 슬쩍 숨은 듯이 자리했었다. 지금은 최근에 지어진 도롯가의 집이 마당을 활짝 열어 놓아서 한길에서도 송포정의 옆모습이 보인다. 송포정은 남쪽의 보현산을 바라보고 서 있다. 담은 높고 대문은 잠겨 있으나 옆집의 마당을 밟고 정자에 오를 수 있다. 송포정은 정면 4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지만 풀의 성장력을 탓하고 싶을 만큼 정자는 깔끔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종악은 19세였다. 그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모친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숙부인 망운(望雲) 조지(趙址)에게 재차 간청했다. 그러자 숙부는 칼을 주며 시(詩)를 지어 격려했다 한다. ‘천지가 넓고 넓으나 이 칼을 놀리면(天地恢恢遊此刃) 하나의 칼이 능히 백만의 스승에 비길 것이다(一劒能當百萬師).’ 이 시가 송포정의 주련으로 걸려 있다. 전장에서도 그는 매일 밤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한다. 어느 날은 길을 가로막은 호랑이가 꼬리를 내리고 물러났고, 어머니가 병이 깊었을 때는 승냥이가 노루를 쫓아 들어왔다고 한다. 화산(花山) 권응수(權應銖)는 ‘충(忠)을 효문(孝門)에서 구한다 하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고 했다. 마루에 등잔과 부채가 걸려 있다. 후손들이 모여 찍은 큼지막한 사진도 걸려 있다. 시계와 유리창과 부채는 누구나의 것이다. 환영의 인사는 모든 이에게 향한다. 덕성이란 덕으로 성을 쌓는 일이다.
 

공동기획:청송군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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