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철학은 먹고 생활하는 우리 삶의 문제를 파고들어야 하기에, 현실을 제대로 알려면 경제의 역사를 공부해야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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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15   |  발행일 2017-12-15 제39면   |  수정 2019-03-20
20171215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을 이끌어내고 지탱할 수 있게 한 하나의 문구를 이야기하자면 마오쩌둥의 ‘조반유리(造反有理)’가 아닐까 싶어.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의 정당한 도리나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거야. 1968년 68혁명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은 마오쩌둥의 붉은 수첩을 흔들며 이 조반유리의 혁명적 정신에 열광했지. 그 여파는 서구의 정신사를 새롭게 바꿔놓았다고 할 수 있을 거야. 68혁명의 사상사적 전환은 네가 한번 따로 짚어보렴.

조반유리는 낡은 세계를 뒤집어 버리고 싶은 혁명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지. 특히 젊은이들의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혁명적 욕망은 자연적이면서 또한 필연적인 것이었겠지. 그러나 역사가 증명해 보이듯이, 언젠가 다시 이야기해 보아야겠지만, 이 혁명의 욕망은 눈이 가려져 있어서 번번이 구덩이에 빠져 버렸단다.

눈을 뜬다는 것! 태형아, 이 은유적 표현은 아주 많은 논쟁을 품고 있을 거야. 다만 나의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조반유리 다음에는 언젠가 너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는, 스피노자의 다음 구절이 덧붙여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오히려 인식하라.(Sed intelligere.)’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삶은 눈을 감고 산길을 뛰어 내려가는 것과 같을 거야. 그러면 도대체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태형이 너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이지만 그것이 도대체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 싶구나. 왜냐하면 나 스스로도 무엇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야. 나이가 들면 많이 알 것 같았지만 나이 들어보니 헛말이더구나. 시간은 결코 우리에게 그냥 지식과 지혜를 주지 않아. 인식하라고 하는 스피노자의 말은 완벽한 능동적 사고를 의미하는 거겠지.

젊은이들의 미래가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 거라는 이야기는 이제 이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화두인 듯 해. 그러나 다들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다만 그걸 모면할 정책들과 처세만 분분하지. 어떤 대통령 어떤 국회의원을 뽑는가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듯이 보여. 인식의 힘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어. 그러다보니 너희들이 당연히 가져야 될 분노나 조반유리의 욕망은 흔적조차 없어져 버린 것 같구나.

오히려 인식하라!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떻게, 그리고 왜 서 있는가? 이것을 알고자 함이 바로 학문(철학)이 아니겠니? 학문이란 것이 현실을 도식화하는 작업이라면 학문은 현실로부터 주어진 것을 기술하고 더 나아가 미래에 구현되어야 할 세계를 치밀하게 구상해야겠지. 그런데 지금 우리의 학문은 무엇을 하고 있지? 네가 공부하려는 철학은 과연 무얼 하고 있을까? 철학을 통해서는 우리의 삶을 더 깊게 성찰할 수 없게 되었어. 차라리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경제학이 우리 현실을 더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아마 이건 사실일 거야. 경제학을 모르고 우리는 우리 현실을 제대로 알 수가 없어. 물론 온갖 숫자들 범벅인 그런 경제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경제의 역사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지금부터 몇 차례에 걸쳐 신자유주의에 대해 같이 고민해 보려고 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을 살펴본 후 신자유주의의 내면화에 대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푸코 등의 논의를 살펴보려고 해. 철학과 신자유주의 경제가 무슨 관계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질문 자체가 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철학은 고담준론(高談峻論)이 아니라 먹고 생활하는 우리 삶의 문제를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신자유주의를 우리의 현재 삶을 설명하는 핵심 열쇠말로 설정해도 무리 없는 이야기일까? 신자유주의란 무엇일까? 단지 정책의 현재적 특수성이거나 현 자본주의의 경향 중 하나일까?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아도 그것의 구체적 정의나 의미에 대해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거야. 학자들도 제 각각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야.

신자유주의는 흔히 ‘공공 부문의 축소와 이것의 민간 부문으로의 이관을 통한 작은 정부 지향, 규제 완화, 시장 원리중시와 같은 경제 정책 때문에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회귀 또는 그것의 현대적 응용’으로 요약되곤 해. 하지만 이것이 왜 그렇게 변화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찾기 어려워. 변화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이윤과 이윤율의 변동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싶어. 자본주의는 이윤의 획득에 따라 움직이고, 이윤의 획득 방식에 따라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도 변화해 우리가 핵심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자본주의 흐름이 어떠한 정치경제적 배경에서 형성되었나 하는 점, 다시 말해 우리의 불행이 왜 하필이면 이 신자유주의의 그물에 걸려있는가 하는 점일 거야. 다음 편지에서는 그것을 살펴보고 사상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내면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번 이야기해 보자. 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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