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셀프 용서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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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08   |  발행일 2018-03-08 제31면   |  수정 2018-03-08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30대 초반의 그녀는 외아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정착한다. 가진 돈이 870만원뿐이었지만 기죽기 싫어서 부유층 행세를 한다. 그게 화근이었다. 어린 아들이 돈을 노린 유괴범에게 납치돼 살해된다. 낯선 곳에서 끔찍한 일을 당한 그녀는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한다. 지옥 같은 삶이 이어지던 어느 날, 구원의 손길이 찾아온다. 그녀는 이웃의 권유로 교회에 다니면서 위안을 얻는다. 급기야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그가 있는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살인범의 말에 큰 충격을 받고 분노한다. 피해자의 동의도 없이 신이 먼저 살인범을 용서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절규한다.

2007년 개봉된 영화 ‘밀양’의 줄거리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종교와 용서에 대해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한 악인(惡人)이라도 신 앞에 회개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고 있다. 종교를 빙자해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공짜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셀프 용서’ 사례를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요즘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운동도 위선적인 셀프 용서에서 촉발됐다. 서지현 검사는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그의 간증 동영상 때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돈봉투 만찬 사건’에 연루돼 면직된 안씨가 교회에 다니면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안씨의 간증 동영상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안씨는 ‘나름대로 깨끗하게 살아왔는데 억울하게 공직을 그만두고 극심한 고통을 느꼈지만 지금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 교만했던 과거도 회개하고 있다’는 등의 간증을 했는데 참으로 이상한 회개다. 이에 대해 서 검사가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된다”고 한 말은 지극히 옳다.

미투운동의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진정 잘못을 뉘우친다면 신을 찾기 전에 피해자부터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게 맞는 순서다. 종교와 신을 팔아 아무리 멋지게 회개 코스프레를 한들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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