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일상적 폭력도 진보라는 생각은…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우월감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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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1   |  발행일 2018-05-11 제39면   |  수정 2019-03-20
20180511

독일의 철학자이자 평론가인 발터 베냐민(1892~1940). 그는 당대 유명 화가인 파울 클레(1879~1940)의 그림을 좋아해서 그의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을 고가에 구입한다. ‘자기가 응시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막 멀어지려는 참인 듯, 눈은 커다랗게 뜨고 있고 입은 벌리고 있으며 날개는 펼쳐져 있다.’ 베냐민은 그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글의 9번째 테제에서 이 그림을 비유로 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역사의 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지? 이 각각의 이미지들을 하나의 표상으로 떠올리는 것을 너와 나의 숙제로 남겨놓자. 어쨌든 베냐민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역사에서의 인류의 진보라는 생각은 역사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관통하여 진행해나간다는 생각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야. 즉, 진보는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 교조적인 요구로서, 중요한 것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오늘을 ‘지금 시간’으로 충만된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야.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세계가 아니라 베냐민이 주목하는 세계, 혹은 메시아적 구원은 희망도 없이 멈춰버린 시간들, 고통으로 비균질화된 세상들, 일상이 받아들이지 않는 ‘진정한 예외 상태’ 속에 있다는 것이지.

조금은 어려운 얘기지? ‘예외 상태’란 말은 이탈리아 현대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책에서 베냐민을 이어받고 있는데, 아감벤에 따르면 예외 상태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특별한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법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야. 다시 말해 정상적인 법질서 밑에 은폐되어있는 ‘벌거벗은 삶들’이 정상적인 사회질서를 지탱한다는 것이지. 우리 사회의 실업자·비정규직·이주 노동자들이 역설적으로 ‘이 사회’의 주권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구성한다는 것과 같은 얘기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베냐민이 말하는 구원으로서의 진정한 예외 상태란 주권자들이 만들어 놓은 이 호모 사케르의 예외 상태를 멈춰버리는 것이고.

태형아, 오늘 조금 어렵기도 하지만 ‘진보(Progress)’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시·공간적 좌표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았으면 하는 것 때문이야. 앞으로(Pro-) 발걸음(Gressus)을 내디디는 것에 대해 우리는 사회역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개인사적으로, 항상 그것이 앞으로, 혹은 저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왔어. 그렇게 하지 못하면 퇴보하거나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과연 그것만이 진보일까? 진보와 유사한 ‘발전(Develope)’이라는 말도 가려진 것(velo)을 벗겨내는(de-), 즉 어떤 숨겨진 것을 재발견한다는 의미의 신학의 세속적 버전에 다름 아닐까 라고 생각해.

독일 출신의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도 진보라는 개념은 16~17세기 과학적 지식의 진전과 발견의 결과로 형성되었고, 인간이 끊임없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부각되었으며, 진보라는 개념이 일반적 통념으로 정착된 것은 19세기 이후부터라고 말해.

태형아,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야. 세상은 좀더 좋아져야 하고 우리의 자손들은 지금보다 덜 고통스러워야 한다. 다만 아렌트가 이야기하듯이 진보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억압하고, 진보라는 이름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야. 어쩌면 우리의 일상적 폭력도 그것이 진보라는, 즉 ‘내가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우월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내가 진보에 대해 비판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 태형이 너에게 좀 뜻밖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또 어떤 사람은 나의 이 글을 보수를 옹호하는 글로 읽을 수도 있겠구나. 사실 이 보수도 진보주의의 한 변종이지. 왜냐하면 지켜야 할 지금이 진보의 마지막 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다만 나는 앞서 베냐민이 말한, 오늘을 ‘지금 시간’으로 충만하게 하라는 말을 기억하라고 하고 싶구나. 미래를 위해 지금 시간의 고통과 절망을 유보하려는 어떠한 진보와 발전의 서사도 우리는 진정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새로운 천사’는 폭풍 속에서, 지금도 그 자리에서 날개를 펼치며 날고 있겠지.

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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