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5] 대쪽 같은 충신 장응일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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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6   |  발행일 2018-08-16 제13면   |  수정 2018-09-18
“며느리에 어찌 그러십니까” 소현세자빈 賜死 어명에 9일간 救命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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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응일의 신도비. 비문은 성호 이익이 지어 올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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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인의동에는 장응일이 생전에 짓고 학문을 닦았던 청천당이 남아있다. 청천당 옆에는 그의 양아버지인 여헌 장현광이 살던 모원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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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응일은 1629년(인조7)에 치르진 별시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그의 과거기록이 적혀있는 국조문과방목.

구미 출신 장응일은 7세 때 종숙부인 여헌 장현광에게 입양되어 가학을 이었다. 1629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대쪽 같은 관료였다. 1646년(인조24) 헌납 재직 시절, 사사(賜死)의 명이 내려진 소현세자빈 강씨(姜氏)를 위해 구명소(救命疏)를 9일간 계속 올렸다. 이 일을 지켜본 주변 사람들이 장응일을 ‘청천백일 장헌납(靑天白日 張獻納)’이라고 했다. 1673년에는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에 변고가 생기자 이를 부실하게 감독한 대신들의 죄를 청했다가 무고를 당해 황간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장응일은 처음 벼슬에 나갈 때 그의 양부인 장현광이 적어준 ‘충의공약(忠義恭約)’이라는 네 글자를 평생 마음에 새겨 잊지 않았다고 전한다.

7세 때 종숙부인 여헌 장현광에 입양
1629년 별시 문과 급제후 벼슬길 올라
헌납 재직시절 강빈 위해 인조에 상소
거부 당하자 실망해 벼슬 버리고 낙향
1673년엔 효종의 능에 변고가 생기자
관리 대신 죄 청했다 무고로 유배되기도



#1. 뿌리를 옮기다

“아가. 너는 이제 내 아들이다.”

“예, 종숙부님.”

장현광이 너털너털 웃었다. 응일의 나이 고작 7세였다. 제아무리 조숙하고 총명하다고는 해도 바로 전날까지 종숙부였던 이에게 ‘아버지’라는 말이 쉬이 나올 리 없었다.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앞으로의 일은 세월이 도와줄 것이었다.

장열(張烈)의 친손이자 이부춘(李富春)의 외손, 월포(月浦) 장현도(張顯道)와 이씨 부인의 아들 장응일(張應一)은 그렇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아들이 되었다. 장현광은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따르는 이가 아주 많았다. 장현광이나 장응일이나 본관이 인동(仁同)으로 같다는 점에서 심겨있는 땅은 매한가지였지만, 장응일의 입장에서 뿌리는 옮겨진 셈이었다.

장응일은 가학을 잇기 위해 지성으로 임했다. 첫 성과는 문과 급제였다. 1629년(인조7), 명나라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치러진 기사7년별시방(己巳七年別試榜)에서 병과(丙科) 11위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장응일은 1632년 종9품직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시작으로 하여 이듬해인 1633년에는 종6품의 외관직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지냈다. 그러던 중 생부 장현도가 세상을 떴다. 장응일은 관직에서 물러나 상을 치르는 데 성심을 다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1636년에 승문원부정자, 1637년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이 되어 나랏일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부 장현광이 유명을 달리했다. 장응일은 다시금 관로에서 벗어나 상을 치르는 데 진심을 쏟았다. 그리고 1640년 이후가 되어서야 관직에 복귀했다.

#2. 그 누구라도 억울함이 없게

여러 관직의 내직을 차근차근 거치던 장응일이 1646년(인조24) 정5품의 헌납(獻納)에 이르렀을 때였다. 세자빈 강씨(姜氏), 이른바 강빈(姜嬪)에게 사사(賜死)의 명이 내려졌다. 독약을 내릴 터이니 마시고 죽으라는 뜻이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죽이려 한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강빈은 소현세자의 아내로 1637년에 부부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1645년에 돌아왔다. 병자호란의 비극이었다. 하지만 귀국의 안도감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돌아온 지 고작 두 달 만에 지아비 소현세자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것도 그냥 죽음이 아니었다. 아버지 인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만큼 독살이다 아니다 뒷말이 무성한 죽음이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강빈은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왕통이 소현세자와 강빈의 아들이 아닌 시동생 봉림대군에게 넘어갔다. 강빈은 안 그래도 맺힌 게 많았던 시아버지 인조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로 치를 떨었고, 이를 계기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 날 인조의 수라상에서 독이 든 전복구이가 발견되면서 주모자로 강빈이 지목된 것이다. 억울함을 풀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사사의 어명이 내려졌다.

장응일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에 사사의 명을 거두어달라는 구명소(救命疏)를 올렸다.

“일반 백성을 두고도 억측으로 죄를 입혀선 아니 되거늘, 어찌 피붙이의 지친에게 그리하신단 말씀입니까? 어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임금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외려 막말을 해가며 장응일을 비난했다. 그렇다고 단박에 포기할 장응일이 아니었다. 장응일은 다음 날도 상소를 이어갔다.

“신은 그저 임금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어리석은 신하일 뿐입니다. 제가 드리는 모든 말씀 또한 오로지 임금을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데 저로 인해 전하의 노여움이 심해지시니 마음이 너무도 아픕니다. 하오나 전하, 이러다 죽게 될지언정 전하를 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그 분부를 거두어 주소서.”

구명소는 아흐레 동안이나 줄기차게 이어졌다. 하지만 꿈쩍도 않는 임금 앞에서 장응일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청했다.

“신 장응일. 임금을 사랑하는 신하로서, 심지어 간관의 책무를 맡고 있는 신하로서 성의를 다했습니다. 그 날이 벌써 열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는 점점 엄해지기만 하시니 신이 묘당에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모른 체하고 그대로 눌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니 신에게 남은 것은 사임밖에 없습니다.”

인조는 거부했다. 이번 충돌이 문제가 돼서 그렇지, 장응일은 부족함이 없는 신하였다. 하지만 장응일은 임금에게 실망했고 세상에도 절망한 터였다. 결국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사람들이 ‘청천백일 장헌납(靑天白日 張獻納)’이라고 불렀다. 청천백일이란, 청명한 하늘에서 밝게 비치는 태양으로 세상 사람 누구나가 다 알아보는 훌륭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3. 바라옵나니, 이 세상에 정의가 살아 숨 쉬기를

1649년(인조27), 사헌부의 정4품직 장령(掌令)에 임명된 장응일은 바로 그해에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김자점(金自點)의 탄핵에 힘을 실었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공이 크다 하여 1등공신이 된 후 인조의 신임을 등에 업고 하는 짓마다 망령되기가 그지없던 자였다. 처음엔 머뭇거리던 효종은 결국 다음 해인 1650년 봄에 김자점을 홍천현(洪川縣)에 유배시킨 것으로 신료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장응일다운 복귀 신호였다.

이후 장응일은 1653년 삼척부사를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1660년에는 금산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1672년에는 공조참의가 되는 등 관로를 순조롭게 밟아나갔다.

그러던 1673년(현종14)이었다. 장응일은 실로 해괴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에 생긴 변고였는데, 구체적으로 영릉의 석물에 틈이 벌어진 사건이었다. 장응일은 이를 참담히 여겼다.

“신 장응일, 여든을 바라보는 병든 몸으로 그저 나라걱정 말고는 가진 마음이 없습니다. 한데 영릉의 석물에 틈이 생겼다니, 만세토록 보존되어야 할 선왕의 능침에 어찌 이런 사달이 생겼단 말입니까? 자고로 봉심(奉審, 능침을 보살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가만 있었단 말입니까? 신은 이해도 용납도 할 수 없습니다. 한데 전하께서는 이러한 불경불충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천부당만부당, 절대로 아니 될 말씀입니다. 필부도 어버이 장사 지내는 데는 온 정성을 다하거늘, 어찌 한 나라의 임금이 그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장응일은 애초에 가장 길하다고 일컬어지는 수원산에 능을 조성해야 했다며, 관련된 대신들을 엄히 다스려달라 청했다.

그러자 제 발 저린 대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한다는 뜻이었다. 이들은 한입으로 장응일에게 벌 줄 것을 요청했고, 버티고 버티던 임금도 결국 져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장응일은 황간으로 유배되었다.

다행히 유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고령이기도 했거니와, 장응일의 발언에 흠이 있었던 것도 아닌 때문이었다. 이에 1675년(숙종1), 숙종이 해배의 명을 내리면서 장응일은 우승지와 대사간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1676년이 되면서 장응일은 부제학과 대사성의 직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세상과 하직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정에서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장응일은 ‘충의공약(忠義恭約)’이라는 네 글자를 평생 마음에 새겨 잊지 않은 사람이었다. 충성하고 절의하며 공경하고 검소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이는 장응일이 처음 벼슬에 나갈 때, 그를 격려하기 위해 장현광이 적어준 글자였다.

장응일의 묘소는 현재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 독산에 있다. 그리고 신도비는 구미 인의동에 있는데,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신도비문을 지어 올렸다. 특히 인의동에는 장응일이 생전에 지었던 청천당(聽天堂)이 남아있다. 들을 청(聽), 하늘 천(天)의 청천이라니. 청천백일(靑天白日)이라 불렸던 장응일이 귀 기울여 듣고자 한 하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새겨볼 일이다. 또 청천당 지근에는 그의 종숙부이면서 양부이자 스승이었던 여헌 장현광이 살던 모원당(慕遠堂)도 보존되어 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전. 조선왕조실록.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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