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타임] 암각화 보호 위해 물 나눠 달라니

  • 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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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19   |  발행일 2018-11-19 제30면   |  수정 2018-11-19
[하프타임] 암각화 보호 위해 물 나눠 달라니
진 식 사회부 차장

흔히 먹고살기 위해 해선 안 될 짓까지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목구멍이 포도청(捕盜廳)’이란 속담을 쓴다. 포도청은 말 그대로 도둑을 체포(逮捕)하는 관청(官廳)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목구멍, 즉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질러 포도청에 오게 됐다는 뜻이다. 그만큼 극도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요즘 ‘대구취수원 이전’ 사업을 보면 딱 이 속담이 떠오른다. 1991년 3월 대구에선 전대미문의 수돗물 오염사건이 터졌다. 바로 ‘낙동강 페놀 오염’이다. 구미에 있는 두산그룹 산하 두산전자에서 페놀 원액 저장탱크와 연결된 파이프가 파열돼 다량의 페놀 원액이 대구시민 식수원인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이를 모른 채 악취 풍기는 수돗물을 마신 시민 분노는 극에 달했고, 심지어 임신부가 유산하는 사태까지 맞으면서 대구 수돗물은 ‘죽음의 식수’가 됐다. 그래서 대구시민은 아직도 페놀 사건을 꿈에서도 잊지 못한다.

대구시민에게 ‘먹는 물 포비아(공포)’는 현재 진행형이다. 페놀 이후 다이옥산·퍼클로레이트·불산·과불화화합물 오염까지 처음엔 이름조차 생소했던 유해 화학물질이 뇌리에 각인되면서 공포의 무게감은 더욱 육중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대구 취수원 이전’은 그래서 대구시민에겐 ‘목구멍의 포도청’인 셈이다.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구미산업단지의 식수원(낙동강) 오염 사고에서 이제는 좀 벗어나야겠다는 절박함으로 현재 추진 중인 게 바로 취수원 이전이다. 대구시와 정부 당국은 이를 두고 ‘맑은 물 공급 사업’이라 부른다. 명칭이야 어찌됐건 대구시민은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항상 안심하고 마시기를 원한다. 이런 시민의 바람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대구에서는 민선 7기 핵심 시정 과제로 추진되고 있는 것도 서글픈 일이다.

대구시민이 이렇듯 마시는 물에 사활을 걸고 있는 가운데 울산시가 ‘암각화 보호’를 대구 맑은 물 공급 사업의 조건부로 내걸었다. 울산 대곡천을 끼고 있는 반구대 절벽에 새겨진 암각화(국보 285호)가 사연댐 물에 잠겨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댐 수위를 낮춰야 하는데, 사연댐은 울산시민의 식수원이어서 먹는 물 부족 현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대구 동·수성구 11만6천800가구의 식수원인 청도 운문댐 물을 나눠 쓰자는 게 울산시의 요구다.

이에 대해 국무총리·대구시장·경북도지사·구미시장·울산시장이 비공개로 만나 합의를 봤다고 한다. 구미산업단지 폐기물에 대한 낙동강 무방류시스템을 도입하는 대가로 운문댐 물을 울산에 주는 이른바 ‘딜(deal)’이 밀실에서 이뤄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밀실 합의에서 대구 취수원 이전은 빠졌다는 사실이다. 이낙연 총리는 이와 관련한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의 질문에 무방류시스템 도입을 전제로 깔았을 뿐 취수원 이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총리까지 나서 반구대 암각화 주변의 수위를 낮추고 운문댐 물을 울산과 공유하는 방안을 도출했다니, 울산시가 취수원 이전이란 대구의 절박한 사정을 기화로 해묵은 숙제를 풀려는 속셈이라는 인상을 지을 수 없다.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암각화가 없다고 못 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진 식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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