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그림자 노동’이 곳곳에 스며든 세상에서 우리의 몫을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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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15   |  발행일 2019-03-15 제39면   |  수정 2019-05-01
20190315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니. 오늘은 크레이그 램버트라는 사람이 쓴 ‘그림자 노동의 역습’(민음사·2016)이라는 책 이야기를 해 볼까 해.

그림자 노동이란 간단히 말하면 뭔가 열심히 노동을 했는데, 그 노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과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 노동이라고 할 수 있어. 이 말은 가톨릭 사제이자 사상가인 이반 일리치(1926~2002)의 저서인 ‘그림자 노동’에서 처음 언급된 개념이라고 해.

이반 일리치가 주목한 것은 임금으로 보상받지도 못하고 가계의 독립성에도 기여하지 못하는 노동 형태인데, 그가 드는 대표적인 예가 집 안에서 주부가 행하는 가사노동이야. 가사노동은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임금 노동자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는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고 이 그림자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은 근대의 임금 노동과 더불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반 일리치는 어떤 의미에서 임금 노동보다 훨씬 근본적이면서 가치를 가진 이 가사노동이 무급의 그림자 노동으로 취급받는데 대해 비판을 해.

그런데 현재는 가사노동뿐만 아니라 사회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그림자 노동을 요구하고 있지. 한번 주위를 둘러볼까. 셀프주유소, 대형할인매장 장보기 및 카트 반납하기, 앱으로 여행 예약하기, 인터넷뱅킹 비밀번호 관리, 자동응답시스템의 안내 메시지, 맥도날드의 터치스크린 주문,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스타벅스에서 먹고 난 커피컵 버리기 등. 돌아보면 수도 없이 많은 그림자 노동이 있어. 과거에는 직접 노동자와 대면하면서 노동자들이 서비스해 주던 일들을 이제는 소비자가 직접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 마치 우리가 그 회사의 노동자인 것처럼.

물론 고전적인 그림자 노동으로 좀 전에 말한 가사노동이 있을 테고 또 우리가 직장에 출퇴근하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도 그림자 노동에 속한다고 봐야 할거야. 출퇴근 시간과 교통비도 노동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가사 노동처럼 대부분의 직장에선 무급으로 처리되니까 말이야.

이러한 그림자 노동을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경영합리화라고 말할 수 있겠지. 노동자들이 해야 할 일을 소비자들이 대신 해주면서 소비자들은 조금 더 싼 값에 재화를 구매할 수 있다는 논리로 말이야. 어쩌면 이것보다 훨씬 더 세련된 논리로 이러한 노동 형태를 합리화하고 있을거야. 이러한 추세는 산업자동화처럼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되돌릴 수 없는 것일 거라고 생각돼. 더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특히나 사회에 처음 진입하는 청년층의 실업률은 점점 더 증가하겠지.

이 책에 인용된 자료에 따르면 세계경제포럼 통계로 15~24세 젊은이는 세계 인구의 17%를 차지하지만 세계 실업 인구의 40%를 차지하고, 2013년 12.6%의 청년 실업률은 4.5%로 세계 성인 실업률의 3배라고 하는구나. 청년 실업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문제인 것이지.

내가 이 책에서 재미있게 본 것은 인터넷에 관련된 부분이었어. ‘상품 값을 내고 있지 않다면 당신이 바로 그 상품이다’ ‘공짜로 상품을 얻었다면 당신이 상품이 된다’와 같은 격언은 새겨볼 만하지. 특히 앞서 그림자 노동 예에서 빠졌지만 페이스북도 주요한 우리의 그림자 노동이 집적된 곳이겠지. 2012년 페이스북이 주식을 상장했을 때 우린 그 가치가 수천억 달러에 달한다는 점에 모두 놀랐어. 그런데 생각해보면 페이스북을 디자인한 것은 저커버그지만 페이스북을 만들고 유지한 것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페이스북 사용자들 아니겠니. 그래서 일부 사용자는 공개적으로 우리 몫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고 하더구나. 왜냐하면 페이스북이 투자자들에게 판 가치는 바로 우리 개개인의 그림자 노동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지. 물론 그들은 아무런 권리를 찾지 못했어.

하지만 태형아, 이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페이스북이 성공했다고 한다면 그 성공의 요인은 무엇일까. 천재적인 마크 저커버그와 그의 동료들의 뛰어난 아이디어와 기술일까. 그럼 그 아이디어와 기술에 고스란히 천문학적 가치가 담겨져 있을까.

페이스북 가치의 큰 부분은 분명 페이스북에 머물다간 사람들이 떨어트리고 간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연쇄 속에 있어. 월 사용료는 내지 않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콘텐츠가 결합되면서 페이스북이라는 가치가 증식된 것이지. 재화로 몫을 가질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공공적 요소’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전체 페이스북 가치에서 공공적 요소는 과연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있다면 얼마 만큼의 가치를 우리의 것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림자 노동이 직접적으로 스며든 자본과 그 자본이 응결된 것으로서의 공공적 투자로 성장한 법인체들이 ‘모든 재산은 절대적 사유 재산이니 손도 대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노동이란 무엇이며 소유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본다. 우리의 그림자 노동이 스며든 세상에서 우리의 몫을 되찾아 와야 하지 않을까.

[노태맹의 철학편지] ‘그림자 노동’이 곳곳에 스며든 세상에서 우리의 몫을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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