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미의 가족 INSIDE] 여전히 엄마가 필요한 50대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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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5 07:55  |  수정 2019-04-25 07:55  |  발행일 2019-04-25 제22면
엄한 祖父와 父-무심한 祖母와 母
3형제 중 장남으로 유독 많은 상처
치유 위해 묵은 감정·화 터뜨려야
[송유미의 가족 INSIDE] 여전히 엄마가 필요한 50대 남성
<행복한가족만들기연구소 소장 겸 대구사이버대 교수songyoume@dcu.ac.kr>

A씨는 경찰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50대 후반의 남성이다. 유순한 인상과 나지막한 목소리로 보아서는 경찰이라는 직업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그동안 직업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꽤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그랬다. 철저한 위계 체계인 경찰 특유의 직무환경이 힘들었다고 했다. 이직을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이만한 직장도 없겠다 싶어 참아왔는데 어느새 퇴직을 앞두고 있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몇 군데의 자원봉사단에 적을 두면서 열심히 활동해 온 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A씨는 50대 후반에 이르러 자녀들도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자기 앞가림을 할 만큼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것 실컷 하며 즐겁게 살 것 같았다.

그러나 A씨는 문득문득 찾아오는 공허감이 스스로를 불편하게 한다고 했다. 가끔 저녁놀을 등지고 어딘가를 바라보며 힘없이 서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오를 때도 있다고 했다. “그 소년이 어떻게 느껴지냐”고 물으니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듯해 마음이 아프고 처연하다”고 대답했다.

A씨의 아버지는 엄격했다. 3형제 중 장남인 A씨가 유독 잘 되길 바랐다. 부모님은 농사일을 했는데 늘 바빴던 것 같고 접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주로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는 자상하기보다는 무뚝뚝한 편이었고 할아버지에게 늘 눌려 있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엄격함과 종종 고함을 지르는 모습은 아버지와 매우 흡사했다. A씨는 유순하지만 때때로 안에서 차오르는 울분을 내뱉을 때 그 소리를 스스로 들어보면 할아버지,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할머니의 무뚝뚝함과 쏟아내는 한숨 그리고 이따금 앙칼진 음성은 엄마와도 비슷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예전과 다르지 않은 아버지와 엄마의 모습은 아내에게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나이가 들면 달라지겠지”하고 아내를 다독여보지만, 사람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음을 터득했다고 한다.

A씨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경찰 공무원인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내면에 많은 상처를 품은, 화가 많은 사람이다. 큰 소리로 집안을 호령하고 가족들을 제압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무뚝뚝함과 앙칼짐 그리고 무관심으로 대했던 할머니와 엄마 밑에서 웅크리고 위축되어 있는 어린 아이였다. 나이 환갑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그곳에 꼼짝없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A씨는 필자와 만나면서 지금껏 ‘캡슐 형태’로 저장해놓은 어린 시절의 감정들을 서서히 꺼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동안 놓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되었으며, 묵혀뒀던 슬픔들과도 만났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아직도 노력 중이었고, 부모님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 대한 화로 되돌아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억누르고 있던 내면화된 원래의 감정이 들춰지면서 직접 겪게 된 것이다.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 같은 개념을 대중화한 카운슬러인 존 브래드쇼는 이런 과정을 ‘원초적 고통 작업’이라고 했다. “화를 내는 것도 괜찮다. 설사 누가 고의로 당신에게 저지른 일이 아니어도 말이다. 사실 상처 입은 내면의 아이를 치유하고 싶다면 당신은 화를 내야 한다”. 묵은 감정을 진정으로 해소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는 원초적 감정을 터뜨리는 것밖에 없다. 이 과정을 무사히 마치려면 충분한 지지와 도구가 필요하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늘 고통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이 작업을 무사히 마치도록 지지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 횟수가 넘어서면서 아내랑 함께 오게 했다. 50대 후반의 A씨이지만, 여전히 자라지 못한 내면의 아이 성장을 위해 ‘좋은 엄마와 흡사한 환경 만들기’로 접근해 갔다.
<행복한가족만들기연구소 소장 겸 대구사이버대 교수songyoume@dc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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