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안중근家와 왕산家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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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02   |  발행일 2019-05-02 제31면   |  수정 2019-05-02
20190502
박진관 뉴미디어 부장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다.”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 법정에서 구한말 13도 의병대장 왕산 허위를 치켜세우며 한 말이다. 1908년 10월21일 왕산은 서대문형무소 1호로 순국했다. 1년 후 안 의사는 그날 블라디보스토크발 하얼빈행 열차를 탔다. 그리고 닷새 후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그로부터 70년 뒤 10월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다. 왕산과 박정희가 태어난 곳은 각각 구미 임은동과 상모동. 철길과 경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2㎞ 남짓 거리다.

허위와 안중근은 여러모로 닮은 데가 많다. 부잣집 도령으로 태어났지만 독립운동이란 가시밭길을 선택한 것, 무력으로 당당하게 결사항전한 것, 의거를 계기로 두 가문 전체가 독립투쟁에 나선 것, 나아가 우리나라 독립전쟁의 씨앗이 된 것, 후손들이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진 것, 아직도 생가가 복원되지 않은 것 등이다.

지난달 한국기자협회·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관한 ‘임정 100주년, 안중근 의사를 만나다’ 체험연수를 다녀왔다. 하얼빈역을 비롯해 동북열사기념관, 안 의사 순국터인 뤼순감옥 등지를 탐방했다. 하얼빈역은 다섯 차례 가봤지만, 동북항일연군(이하 연군)의 활약을 소개한 동북열사기념관은 처음 들렀다. 연군은 제1군부터 11군까지 편성돼 한때 2만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당시 충칭의 광복군과 만주 연군의 공적은 일본군이었다. 광복군에도 이북출신이, 연군에도 이남출신이 많았다. 분단 조국에서 반쪽짜리 독립운동사만을 배운 세대로선 처음 보는 낯선 한인 연군들이 적지 않았다. 기념관 로비에 우뚝 서있는 동상이 같은 핏줄인 항일영웅 리민이란 사실도 몰랐다. 안타까운 건 연군소속 대부분이 20대에 산화했으며, 그중엔 10대 소녀도 있었다.

기념관 내 수많은 한인 열사중 왕산의 종질인 허형식도 있었다. 6세 때 구미에서 만주로 간 그는 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군장이 됐다. 만주 제일의 항일전사로 불렸던 그는 42년 경안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권총과 말안장, 안경이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고 그를 닮은 동상이 서있다. 의성 사람 배치운의 사진도 눈에 띄었다. 3·1운동 후 20세에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하다 40세에 생을 마쳤다. 중국어로만 된 사진설명엔 둘을 ‘조선족’으로 표기했지만 결코 중국인민이 아니다.

왕산가처럼 안중근가에도 연군이 있다. 안 의사의 조카 안호생은 연군 1로군 참모장을 했다. 하지만 일본군에 체포돼 전향함으로써 오점을 남겼다. 대구와 인연을 맺은 안중근가도 있다. 안호생의 동생 안민생은 칠곡 학명공원에 잠들어있다.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그는 6·25전쟁 때 종숙부 안경근(건국훈장 독립장)과 함께 대구에 정착, 4·19를 맞아 통일운동을 하다 5·16쿠데타 후 혁명재판소에서 각각 10년형과 7년형(안경근)을 선고받았다. 당시 대구고에 재학 중이던 아들(기명)까지 3대가 같은 감옥에 갇혀 기막힌 신세가 됐다. 이들은 2011년에야 무죄로 복권됐다. 안중근의 딸 현생은 대구가톨릭대에서 3년간(1953~56) 근무한 인연으로 현재 교내에 안중근 동상이 있다. 현생의 남편 황일청은 대구에서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진만의 아들 영우에게 폭발물을 국내에 반입시켜 주요시설 파괴를 시도했다.

안중근가와 왕산가 후손 일부가 북한에 살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허형식의 아들 창룡과 하주의 후손,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의 두 아들 우생과 지생의 후손이 그들이다. 최근 구미민족문제연구소가 보훈처에 허형식의 서훈을 신청했다. 임정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손부 허은 여사의 부친 허발과 독립운동으로 20년간 옥살이를 했던 동생 허규(이육사의 외삼촌)의 서훈도 신청할 계획이다. 서훈의 모든 조건을 채우고도 남았던 허규는 유언으로 “통일이 되기 전엔 서훈 신청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은 “남북이 안 의사의 유해를 못 찾은 건 안 의사의 영혼이 분단조국에 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 기자탐방단의 결론과 오버랩됐다. 그렇다. 남북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공유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통일사업은 사상누각이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구가 6·25전쟁 중에 쪼그라들어 왜 조선족자치주가 됐을까 생각해보라. 박진관 뉴미디어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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