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1> 사월 조임의 정자 월담헌과 숙운정

  • 박관영
  • |
  • 입력 2019-06-13   |  발행일 2019-06-13 제13면   |  수정 2021-06-21 17:48
둥근 산자락 기대어 고즈넉이 자리…의로운 선비정신 깃든 곳
20190613
영양군 영양읍 하원리에 있는 한양조씨 사월 종택. 토석 담장에 둘러싸인 종택은 정침과 사랑채가 붙어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사랑채에 월담헌 편액이 걸려 있다.

 

◆시리즈를 시작하며

예로부터 누각과 정자를 일컫는 누정(樓亭)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누정은 선조들의 정신과 혼이 깃든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누정은 거닐면서 경치를 감상하는 유상(遊賞), 독서하고 강론하는 강학(講學), 조상의 은덕을 생각하는 추모(追慕)의 공간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됐다. 이러한 누정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경상도에 많았고, 그중에서도 역사와 전통이 뿌리 깊게 내린 영양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영남일보는 영양의 누정을 둘러보고, 그 속에 담긴 선조들의 정신과 가치를 재조명하는 ‘영양의 魂(혼) 樓亭(누정)’ 시리즈를 연재한다. 시리즈는 영양의 누정에 얽힌 사람살이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선조들의 풍류와 사상을 엿본다. 시리즈 1편에서는 영양읍 하원리에 자리한 월담헌과 숙운정에 대해 다룬다.

사월 종택 건립한 조광조의 후손 조임
임진왜란 때 곽재우 진영 들어가 공 세워
정묘호란 땐 곳간 열어 군량미 헌납하기도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이름 따온‘월담헌’
조임이 홍위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전념

비파담 위에 세운 또다른 정자‘숙운정’
산수를 벗하고 지기들과 시사 논했던 곳
조언겸이 중수해 지금도 문중회의 때 사용




20190613
조임은 하원리 사월종택 사랑채에 월담헌 편액을 걸고 오운, 이준, 신지제, 홍위 등과 폭넓게 교유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월담(月潭)’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무이구곡 중 4곡인 ‘달은 빈산에 가득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다(月滿空山水滿潭)’는 구절에서 따왔다.
20190613
조임이 1621년 지은 또 다른 정자 숙운정. 사월종택과 월담헌이 있는 하원리에 자리해 있고 지금의 숙운정은 1889년에 후손인 조언겸이 중수한 것이다.
 

 

영양의 옛 이름은 고은(古隱), 선비들이 숨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다. 고은의 땅에서도 병화가 닿지 않는 제일 명지가 ‘영양읍 하원리’라 한다. 부드러운 산자락에 감싸이고 마을 한가운데로 반변천이 흐르는 좁은 땅,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이후 그의 후손이 터 잡은 곳이다. 그곳에 달빛이 깊이 내려앉고 구름이 머무르는 정자가 있다. 주인은 ‘그윽한 곳에 숨어사는 사람이 궁한 곳 즐겨서/ 산골짜기에 작은 정자 지었네/ 맑고 깨끗한 물은 면경같이 트여있고/ 겹겹이 쌓인 험한 바위는 병풍을 둘러놓은 듯하다’고 했다.

#1. 한양조씨 사월 조임

그곳의 반변천에는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선유굴(仙遊窟)이 있고, 옥부선인(玉府仙人)들이 바둑을 즐겼다는 옥선대(玉仙臺)가 있다. 또 반변천과 동천이 만나 비파와 같은 물소리를 낸다는 비파담(琵琶潭)이 있다. 이러한 천을 내다보며 모난 곳 없이 둥그런 산자락에 기대어 한양조씨(漢陽趙氏) 사월(沙月) 종택이 자리한다. 일찍이 고승인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명당이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이는 조광조의 손자 조원(趙源)이었다. 조원은 조광인(趙光仁), 조광의(趙光義) 두 아들을 두었고, 조광인의 아들이 조검(趙儉), 조임(趙任), 조적(趙籍)이다. 임진왜란 이후 대부분 분가해 떠났지만 하원리에 남은 이가 조임이었다.

조임의 자는 자중(子重), 호는 사월(沙月)이다. 아버지 조광인은 증한성부판윤(贈漢城府判尹)을 지냈고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충순위(忠順衛) 안수인(安壽仁)의 딸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충신열사들의 전기를 탐독했다고 한다. 1592년 그의 나이 2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형 조검 등과 함께 곽재우 진영에 들어가 화왕산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의 호 ‘사월(沙月)’은 1597년 의병이 해산될 때 곽재우가 조임의 의로움을 칭찬하며 지어준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조임은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차남이라 물려받은 재산도 거의 없었다. 그가 장성해 영해의 안동권씨 종가와 혼인을 맺은 이후 처외가인 인량리 대흥백씨 집안의 재산을 1천석 넘게 물려받았다. 그 재산으로 그는 1602년 하원리에 종택을 지었다고 한다. 토석 담장에 둘러싸인 종택은 정침과 누각인 사랑채가 붙어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에는 사당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그는 ‘이런 경치는 100리, 200리를 가더라도 구하기 어려운데 이같이 가까운 곳에서 얻게 되었으니 조물주가 공교로움을 다하고 기이함을 나타내어 100년을 감추어 두었다가 오늘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라고 했다. 조임은 사랑채에 월담헌(月潭軒) 편액을 걸고 그곳에서 오운(吳澐), 이준(李埈), 신지제(申之悌), 홍위(洪瑋) 등과 폭넓게 교유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2. 달빛 깊은 월담헌

우뚝한 정자다. 제각각 크기와 모양이 다른 바윗돌 위에 육중한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을 올렸다. 대청마루가 4칸, 사랑방이 2칸인데 사랑방 뒤쪽으로 책방 1칸이 더해져 전체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책방은 과거 사당에 모신 위패를 도난 당한 이후 줄곧 감실로 이용해왔다고 한다. 조임이 쓴 월담헌기에 ‘마루와 방을 남향으로 세웠다. 그 규모는 마루가 네 칸이요 방이 세 칸으로 겨울과 여름의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데 알맞고 그윽한 회포를 펴기에 충분하니 월담헌이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되어 있다. 기문의 모습과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다.

대청의 전면 및 우측면과 배면에는 쌍여닫이세살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설주가 있는 영쌍창이다. 전면과 우측면으로 낮은 난간을 세운 툇마루를 이어 놓았고 배면에는 난간 없이 툇마루를 놓았다. 대청 문을 열면 반변천 물길과 먼 산이 환하다. ‘월담’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가져왔다. 4곡인 ‘달은 빈산에 가득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다(月滿空山水滿潭)’는 구절이다. 현판은 창석 이준(李埈)의 글씨다. 조임의 손자인 조시광(趙是光)의 문집에 이준이 조임에게 준 시가 전한다. ‘아름다운 원당 푸른 물결 북쪽에/ 바람 부는 월담헌 조촐하게 물결에 비친다./ 송당의 굽은 난간 푸른 솔은 늙었고/ 버들 스치는 평평한 모랫벌에 푸른 선은 길게 뻗었다./…중략…/대나무 창문 가을에 열면 구름이 책상을 쓸고/ 꽃 주렴 봄에 걷으면 달은 사람을 찾아오네’

#3. 구름이 머무는 숙운정

조임은 1621년 ‘정절(靖節)선생’이라 불렸던 도연명의 뜻을 취해 비파담 위에 또 다른 정자인 숙운정(宿雲亭)을 건립했다. 숙운정에서 그는 산수를 벗하고 시가를 짓고 지기들과 울분을 삭이며 시사를 논했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중앙에 2칸 대청을 열고 좌우에 온돌방을 1칸씩 배치했다. 정자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고 전면 담장 사이에 사주문을 세웠다. 정자의 오른쪽에는 조임의 신도비각이 자리한다. 현재 숙운정은 1889년에 후손인 조언겸(趙彦謙)이 중수한 것으로 하원리 마을 입구에 있으며 지금도 손님접대와 문중회의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인조 5년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조임은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나라 은혜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벼슬에 있지 않다고 하여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곳간을 열어 군량미를 나라에 헌납했다. 1636년 청나라가 다시 침입했을 때 그는 이미 일흔에 가까운 고령이었다. 그는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소를 올리고 형 조검과 함께 집 뒤에 단을 쌓아 매일 밤 이 땅에서 오랑캐를 몰아 낼 것을 하늘에 빌었다. 이후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형제는 단에 올라 통곡했다고 전한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축천단(祝天壇) 충절’이라 했다. 축천단이 있던 자리에는 1827년에 세운 비가 보존되어 있다. 기문을 쓴 김유헌은 ‘어진 사람이 죽으면 서원을 짓고 빛나는 현판을 내거는 것을 보았으나 평지 한 조각 땅에 축천단이라 이름 하여 백대의 청풍을 일으키는 것을 누가 보았는가’라며 그들의 고절을 기렸다.

조임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朝聞道) 저녁에 죽어도 좋다(夕死可矣)’는 논어 구절을 가슴에 새기고 평생 경계하는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병자년 이후 그는 문을 닫고 폐인을 자처하며 여생을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일생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 의를 숭상하되 재물을 가벼이 하였던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국가문화유산포털 자료, 내고장전통가꾸기(영양군, 1982), 경북문화재대관(경북도, 1980).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