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충남 금산 진락산 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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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26   |  발행일 2019-07-26 제36면   |  수정 2019-07-26
길 열어주며 곧게 서 있는 전나무…길 끝에 숨겨놓은 듯 보석같은‘寺’

보석사 전나무길
일제가 훼손해 땅에 묻은‘의병승장’비각 찾아내 세워
조선 마지막 도화서원 글씨, 그림 어울린 편액 단 범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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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금산군 보석사 일주문에 들어서면 200m 남짓 전나무 숲길이 뻗어있다. 이 길에는 의병승장 영규대사의 순절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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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사로(路)의 가로수 가슴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충남 금산군 진락산 보석사로(路)에 들어서자 가로수들의 가슴에 달린 노란 리본을 본다. 뜨개질로 만든 리본이다. 누구의 마음일까, 수십개는 되는 듯하다. 보석사 표석을 따라 길을 꺾으면서 노란리본을 잇는다. 산길을 예상했지만 절집 초입은 어쩐지 어수선하고 복작거리는 마을이다. 갑자기 몇몇 아이들이 불쑥 나타났다가 멀어진다. 지금쯤 학교에 앉아 있어야 할 나이 같은데 “왜?”라는 의아함이 자라기도 전에 일주문이 나타난다. 금산의 진락산(眞樂山) 보석사(寶石寺)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200m 남짓 되는 전나무 길이 뻗어 있다. 갑자기 쏟아져 휩싸는 초록의 내음과 고요에 문 밖의 마을은 마치 100리 밖인 듯하다. 얼굴 근육이 말랑말랑해지고 수면에 동심원을 그리는 소금쟁이처럼 몸이 가벼워진다. 길을 열며 곧게 서 있는 나무들은 하나하나가 신성을 지니고 있어서 신전으로 향하는 기둥이나 순례자의 행렬과는 완전히 다른 부드러운 긴장을 주위에 퍼뜨리고 있다. 그러한 긴장은 구름을 밟는 것처럼 단숨에 나를 아득히 높고 먼 곳으로 날아오르게 한다.

숲속에 비각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비각에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 대사의 순절비가 모셔져 있다. 앞면에 ‘의병승장(義兵僧將)’ 네 글자가 엄중한 경직성을 가진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순조의 사위인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의 글씨라고 한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영규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홀로 1천여명의 승병을 규합해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고 왜군의 호남지역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금산전투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비는 헌종 6년인 1840년에 당시 우의정이었던 조인영(趙寅永)이 비문을 짓고, 금산군수 조취영(趙永)이 글씨를 써서 이곳에 세웠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 일본 경찰이 비각을 헐고 비문을 훼손한 후 땅에 묻었는데, 1945년 광복의 해에 정요신(鄭堯臣)이 비를 찾아내 다시 세웠다. 비각 뒤에 네 개의 영세불망비가 서있다. 그중 두 개는 두 동강, 세 동강 난 것을 다시 이어놓은 모습이다. 깨진 비석을 보면 마음에 금이 가는 것만 같다.

전나무 길 끝에 보석사 편액을 단 범종루가 나타난다. 글씨와 그림이 어우러진 편액이다. 글씨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도화서원이자 영친왕의 서예 선생을 지낸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의 것이고, 글씨 좌우의 난초와 대나무를 그린 이는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이다. 두 사람은 함께 전국의 사찰을 다니면서 이 같은 형태의 편액을 두루 남겼다고 한다. 예전에는 범종루 누문으로 대웅전 마당에 올라섰다고 하나 지금은 문을 닫아걸고 옆쪽으로 따로 마련된 문으로 드나든다. 세 칸 대문은 양반집 대문과 비슷하다. 근래에 세웠는지 나무향이 짙다. 문 속에 대웅전이 가득 차 있다.

진락산 보석사
절 앞 산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 제작 ‘보석사’라 불러
대웅전 붉은 두리기둥 머리,흔치않은 장신구 그림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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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사 대웅전, 기허당과 산신각. 고종 때 명성황후에 의해 다시 지어졌으며 기허당에는 영규대사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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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승장 영규대사의 순절비. 순절비 앞면에 ‘의병승장(義兵僧將)’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금산읍의 남쪽에 진락산이 솟아 있다. 높이가 700m 조금 넘는데, 충남에서 셋째 혹은 넷째로 높은 산이라 한다. 보석사는 진락산의 남동쪽 기슭에 자리한다. 규모도 작고 흔한 석탑 하나 보이지 않지만 신라 헌강왕 때인 886년 조구(祖丘) 대사가 창건한 오래된 절집이다. 절 앞의 산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조성했다고 해서 보석사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이후 고종 때 명성황후가 다시 지어 원당으로 삼았다는 것 외에 역사의 상당 부분은 공백이다. 1921년부터는 31본산의 하나로서 전북 일대의 33개 사찰을 말사로 두고 통괄했고 강원(講院)이 있어 많은 학승을 배출했다고 한다.

본전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대웅전 편액은 조선 말기 호남지방의 유명한 명필 완산(完山) 이삼만(李三晩)이 썼다. 단청이 화려하다. 붉은 두리기둥의 머리 부분은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장신구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웅전 앞쪽에 쪽마루를 두었는데 이 또한 흔치 않은 형태다.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모셨는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섬세해 조선시대 불상 중에서는 극치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전 옆에는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기허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편액 또한 이삼만의 글씨다. 기허당의 좌측 뒤쪽에는 산신각이 자리하는데 명당자리라는 소문이 있다.

대문 오른쪽에 의선각(毅禪閣) 현판을 단 건물이 있다. 영규대사가 보석사에 머물 때 처소로 이용했던 건물이다. 현판은 창녕위 김병주가 썼다. 의선각 뒤쪽은 낮은 기왓장 담장으로 대웅전 경역과 구획된 심검당(心劒堂) 경역이다. 근래의 것으로 보이는 심검당에는 보석사 불교대학, 등운선원(騰雲禪院)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예전에 있었다는 강원의 부활 같다. 대문 왼쪽에는 세 칸의 정갈한 건물이 하나 있는데 주지스님의 처소가 아닐까 싶다. 그 뒤쪽에 사주문이 나 있다.

보석사 은행나무
사주문밖 여섯그루가 하나로 합쳐진 천년수행 은행나무
도로에 접어들면서 스쳐 멀어지는 가로수의 노란 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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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사 은행나무. 수령 1천년이 넘은 것으로 천연기념물 365호로 지정돼 있다.

사주문 밖에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가 지상으로 내려앉아 있고 길 건너 너른 비탈에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 1천년이 넘었다는 나무다. 높이가 40m, 둘레는 10.4m이며 가지는 동서쪽으로 25m, 남북 쪽으로 29m 정도 뻗어 있다. 대단히 장엄하다. 가슴에는 색색의 종이를 매단 금줄이 둘러져 있다. 나무는 보석사를 창건한 조구대사가 제자 다섯 사람과 함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여섯 그루를 심었는데 그들이 자라 하나로 합해졌다고 한다. 육바라밀은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보살의 실천행으로 이상경인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수행법을 말한다. 보석사 은행나무는 천년의 수행 끝에 열반에 든 것 같다. 그는 나라에 이변이 있을 때 하루 종일 운다고 한다.

은행나무 앞 벤치에 소년과 앳된 얼굴의 여자가 앉아 있다. 주고받는 대화가 끝이 없다. 문득 절집 초입에서 보았던 아이들이 생각나고, 다시 의구심이 자라기 시작한다. 보석사를 떠나 도로에 접어들면서 돌연히 돌아본 눈길 끝에서 간디학교를 발견한다. 아,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스쳐 멀어지는 가로수의 노란 리본에 은행나무의 금줄이 겹쳐진다. 우우, 소리는 내지 않지만 나무의 실핏줄을 타고 흐르는 수액은 언제나의 울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 경부고속도로 대전방향으로 가다 황간IC로 나간다. 4번 국도를 타고 영동읍으로 간 뒤 영동교차로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가다 묵정교차로에서 묵정리 방향으로 나간 후 마포삼거리에서 우회전, 곧 외마포삼거리에서 금산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68번 지방도를 타고 금산읍으로 가 13번 국도를 타고 남일면 방향으로 남하하다 석동삼거리에서 보석사 방향으로 우회전해 간다. 간디학교 옆길로 조금 들어가면 보석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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