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6> 청기리 돈간재·청계정·취수당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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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05   |  발행일 2019-09-05 제13면   |  수정 2021-06-21 17:54
병자호란 치욕 안고 天獄의 땅에 세운 절의와 仁義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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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청계정 앞 연못에 연꽃들이 하나둘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청계정은 병자호란의 굴욕으로 세상과 연을 끊고 청기리에 들어온 우재 오익이 지었다. 우재는 청계 김진의 외증손자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은거하며 효도와 우애로 살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람들은 그 땅을 천옥(天獄)이라 불렀다. 하늘이 만든 감옥, 그곳에 처음 들어온 이는 안동에 살던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靑溪) 김진(金璡)이다. 그는 관아에서 개간 허가를 받아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우거진 조피나무를 베어다 집을 지으니 사람들은 이 마을을 ‘조핏골’이라 불렀다. 청계 이후 15세 후손까지 이 마을에 세거하였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계의 외증손자인 함양오씨(咸陽吳氏) 취수당(醉睡堂) 오연(吳演)과 그의 형 우재(愚齋) 오익(吳瀷)이 조핏골로 들어왔다. 호란의 치욕에 분개해 스스로 선택한 곳이 천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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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간재는 청계 김진이 청기리에 들어와 ‘흥림초사’라 이름 짓고 지역의 선비들과 교유하던 집이라고 알려져 있다. 청계가 죽은 뒤 증손인 표은 김시온이 돈간재라 편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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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구성된 누각인 취수당. 우재 오익의 동생인 오연은 병사를 모집해 이곳에서 병서를 강론했다고 한다.
 

#1. 청계의 집, 돈간재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청기리(靑杞里)가 되었다. 조핏골은 자연부락의 이름으로 기억에만 남아 있다. 청계는 말년에 청기리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조 10년인 1577년경에 낙후된 교육을 개탄하며 영양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웠다. 그리고 1580년 안동에서 타계했다.

돈간재(敦艮齋)는 그가 청기리에 들어와 ‘흥림초사(興林草舍)’라 이름 짓고 지역의 선비들과 교유하던 집이라 한다. 돈간재라 편액한 것은 청계의 증손인 표은(瓢隱) 김시온(金是穩)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나라가 청에 항복하자 증조부의 터전인 청기리로 들어왔다.

돈간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둔 매우 검소한 모습이다. 너른 마당을 앞에 두고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담을 둘렀으며 정면과 우측면에 사주문을 내었다.

돈간재의 우측에는 주사(廚舍)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자리한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에 ‘ㄱ’자형 평면이며, 헛간채는 3칸 규모의 ‘ㅡ’자형 평면으로 전체적으로 ‘ㄷ’자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돈간재는 사랑채, 주사는 안채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주사 대문에 ‘인(仁)을 머리에 이고, 의(義)를 가슴에 품다’라는 글이 단정하게 붙어 있다. 대문 앞을 기웃거리니 어디선가 한 사나이가 나타나 문을 열어 준다. “편하게 보세요.”

본채 마루에 ‘흥림초사’ 현판이 걸려 있다. 부엌문에도 ‘인(仁)’과 ‘의(義)’ 두 글자가 붙어 있다. 이 두 글자는 지금도 후손들이 품고 살아가는 행(行)의 뿌리인 듯하다.


의성김씨 청계 김진 말년 청기리 이주
정자 돈간재 짓고 지역 선비들과 교류
청계정은 김진 외증손자 오익이 건립
병자호란에 분개 세상 인연끊고 은둔
동생 취수당 오연 호란 일어나자 참전
효종 북벌추진땐 병사훈련·병서 강론



돈간재의 ‘돈’은 두텁다는 뜻과 노력한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간’은 은둔하다는 뜻과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돈간재는 삶의 어려움을 묵묵히 견디며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벗 삼아 청빈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청계의 증손 표은은 어려서는 총명했고 커서는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글을 읽으며 은둔하였고 이후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말이 많으면 도(道)를 해친다’하여 시를 즐기지 않았다 한다. 그는 현종 10년인 166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숭정처사지묘(崇禎處士之墓)라 쓰도록 하라’고 했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다. 명나라의 멸망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이들은 숭정처사라 했다. 이후 그것은 ‘대쪽 같은 기개’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2. 청계정 혹은 우재

청계의 외증손자 우재 오익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선조 24년인 1591년에 영양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언제나 행동에 무게가 있었다고 한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번번이 실패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은거하며 효도와 우애로 살았다.

이후 병자호란의 굴욕으로 비분강개하여 세상과의 연을 끊고 표은의 돈간재 가까운 곳에 정자를 지었다. 청계정(靑溪亭)이다. 우재의 처음 호는 청계(靑溪)였다. 정자를 청계정이라 이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외증조부인 청계 김진과 호가 같아 ‘우재’라 바꾸었다 한다.

청계정 앞에는 청계천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앞산은 천일봉(天一峯)이라 하여 명현들이 놀던 곳이다. 정자는 천변의 자연 암반 위에 올라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측 2칸은 온돌방, 가운데와 우측 4칸은 마루방이며 정면과 측면에 쪽마루를 내고 계자 난간을 둘렀다. 정면의 난간 바로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다.

전면과 오른쪽 측면 처마도리에 ‘청계정’ 현판이 걸려 있고 온돌방에는 ‘우재’ 편액이 걸려 있다. 기단으로 사용된 암반에는 ‘우재구허(愚齎舊墟)’라는 글이 초각되어 있다. 정자와 연못은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담에 둘러싸여 있고 우측에 사주문이 나 있는데 전체적으로 규모는 소박하나 짜임은 견실하다.

청계정 앞에는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는 눈향나무가 있다. 영양군 제34호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청기리 주민 약 500명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가에 자라고 있어 물맛이 향기롭다고 한다.

표은이 세상을 떠날 때 우재에게 산과 땅을 떼어 주었다고도 하고, 우재가 청기리로 들어올 때 표은이 토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너무 많아 사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둘 사이의 친분과 사상적 교류는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은이 우재에게 남긴 시에 ‘병으로 인하여 삼년을 누웠으니, 팔년 동안 이웃으로 지낸 정 잊기 어렵네. 푸른 눈빛으로 바라본 반가움 오히려 옛날부터 사귀어온 인연 같은데, 흰머리 되도록 사귀어도 어찌 이제 막 사귄 사람 같다는 인연일 수 있으리’라 했다. 우재 이후 자손들은 표은의 후손들과 함께 청기리에 세거하며 화수촌을 이루었다 한다.

#3. 취수당 또는 둔재

취수당 오연은 우재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그는 정2품인 통훈대부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에 제수된 바 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쌍령전투(雙嶺戰鬪)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아버지의 집이 있는 고향 대천리로 낙향했는데 이를 들은 표은이 그를 청기리로 불렀다고 한다. 오연의 호는 취수당 또는 둔재(遯齋)로, 후자는 은거 이후의 자호가 아닐까 싶다.

취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을 올린 누각이다. 자연석을 쌓아 시멘트로 마감한 기단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둥근 누하주를 세웠다. 오른쪽 2칸은 온돌방이며 중앙과 왼쪽 4칸은 마루방이다. 정면 가운데에 ‘취수당’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 측면에는 망서루(望西樓) 현판이 걸려 있으며 온돌방에 ‘둔재’ 편액이 걸려 있다. 정면과 양 측면에 쪽마루를 놓았는데 정면에는 계자 난간을 달았고 좌측 망서루 아래에는 머름형의 평난간으로 과거 계자난간에서 풍혈이 있는 청판만 남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망서루 쪽의 뒤쪽 석축 위에 비석 하나가 서 있는데 ‘사명대(思明臺)’라 새겨져 있다고 한다.

1649년에 효종이 즉위했고, 당시 각 마을에서는 국력을 배양하고 북벌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민간인 군사조직을 기르고 있었다. 이때 취수당은 표은 김시온과 함께 우재 오익, 창석(蒼石) 이준(李埈),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등의 도움으로 취수당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병서를 강론하고, 집 앞 언덕에서 말 타고 활 쏘고 칼을 쓰는 법을 병사들에게 익히게 했다 한다. 그 언덕에 훈련병 막사를 짓고 마구간을 지었으므로 ‘군막구(軍幕丘)’라고 한다. 취수당 앞 언덕은 지금 밭이다.

취수당 뒤에는 우재의 5세손인 오행대(吳行大)가 처음 짓고 8세손인 오정교(吳正敎)가 더욱 확장시킨 ‘숭조고택(崇祖古宅)’이 자리한다. ‘숭조’란 조상을 숭배한다는 뜻이다. 숭조고택 입구에 서면 수많은 봉우리들이 능선을 이루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인다. 천옥이라 했던가. 청기리에는 ‘의(義)’와 ‘인(仁)’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를 천옥에 가두었던 이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숭조’로 살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영남인물고. 국조인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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