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누가 코뮌에 돌을 던지는가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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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5   |  발행일 2019-11-05 제35면   |  수정 2020-09-08
[CEO 칼럼] 누가 코뮌에 돌을 던지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화주의는 ‘자유’를 선(先) 가치로 둔다. 정치학자 토크빌에 의하면 공화주의의 시류는 ‘코뮌’으로부터다. 자유의 기치로 개별의 덕성을 발휘해 공공의 타운을 형성한다는, 이는 곧 (자유주의의) 원론을 원론답게 하는 ‘시대정신’의 시발이다.

‘공공주택’ 사업이 뜨겁다. 그냥 뜨겁다 못해 바짝 익힌 샛노란 감자다.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함으로 법위에 ‘특별함’마저 올렸다. 사업의 원류는 공공주택 사업자가 국토교통부에 제안, 국토부에서 이를 승인하면 계획 지구를 고시·지정하는 것인데, 정부는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주택 70만 가구와 임대주택 80만 가구 등 총 150만 가구를 대중(서민)에 공급했다. ‘주거의 자유보장’을 위해 국가가 발 벗고 나선 셈인데, ‘국가의 개입’과 ‘법 상 간섭’은 오롯이 자유 수호와 공동의 타운형성을 전제한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숨죽여온 이들이 특별해 마지않은 공공의 잣대에 침을 뱉는다. 그리고 이들은 정부의 공익사업을 ‘강제수용’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재산권 침해와 불합리한 토지보상법에 관한 성토를 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들은 국가가 평생 일궈온 터전을 헐값에 수용하는 것도 모자라 양도로 인해 발생한 이익 세금(양도소득세)마저 걷으려 하다니, 개탄에 지친 나머지 노상발괄마저 서슴지 않겠다는 태세다. 소수인 이들은 분명 굳건한데 하릴없이 슬프다.

극단의 우려인데 자칫 ‘로크 이론’으로 번질 공산이다. 국가가 개인의 ‘재산권 보장’이라는 국가적 책무를 도외로 한 채, 되레 사유 권리를 강제로 뺏으려 드는데 오는 ‘공포 심리’의 발로다. ‘강탈’이라는 어감에 시비를 가릴 것 없다. ‘토지물권을 공공필요에 의해 강제적으로 박탈하는 공법상 공용부담’, 토지수용법의 사전적 의미다. 내 땅인 듯, 내 땅 아닌, 분명 내 땅 같은데 결국 내겐 없는 땅. 이를 개인주의로 볼 것인가, 아님 ‘님비’로 치부할 것인가. 단언컨대 자유다. 진정한 자유로의 선결 가치는 ‘개별의 행복’으로 부터다.

1960년대 국가는 구로공단을 조성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토지를 강제 수용했다. 공단 부지에 터전을 다져온 농민들을 국가는 불법으로 연행했고, 감금한 뒤, 땅을 뺏었다. ‘불만 표출’의 사유를 들어 소송 사기범으로까지 몰았다. 농민을 겁박해 농지를 겁탈한 공권력은 자찬했다. 그들끼리 축배를 들고, 훈장을 수여하며, 성과급을 나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폭리를 취했고, 농민을 거리로 내몰았다. 그렇게 탄생한 구로공단에는 어린 여공들의 ‘애환’이 깃들고, ‘산업화의 심벌’이라는 국민적 ‘애칭’이 따랐으며, 그 가운데 일거에 터전을 잃은 농민의 ‘애’는 외면된 채 타들어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지 않았다.

하우스 푸어의 시린 이를 공공주택은 따뜻이 감싼다. 취약계층을 상대해 저렴한 시세로 (주택을) 공급하는 선(善)의 선(先)순위 정책임에 공감한다. 단 전제 조건이 따른다. 싸게 사들여 비싸게 되팔려는 ‘상업적 속성’을 버려야 한다. 잃은 만큼 메워줄 보상책이 수반돼야 한다. (강제) 토지수용에 관한 ‘위헌여부’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뭣보다 ‘공공’을 주창하려면 ‘공공기업’에서부터 ‘사사로움’을 배제해야 한다.

공익은 아름답다. 개인의 손해를 감내하는 ‘살신성인’이란 더욱 찬란하다. 다만 개인의 희생이 ‘보편’으로 터부시돼선 안 된다. 공공이라는 시대적 사명이 자칫 ‘파시즘’의 부메랑으로 꽂힌다면, 이는 떠올려만 봐도 끔찍할 노릇이다.

이동군 (군월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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