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12> 주실마을 학자들의 정자 - 주곡리 월록서당·만곡정사·학파헌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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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8   |  발행일 2019-11-28 제14면   |  수정 2021-06-21 18:03
벼슬에 연연않은 주실마을 선비들의 학문과 정신이 깃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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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일월면 주곡리에 위치한 월록서당. 조선시대 문신 옥천 조덕린의 손자 조운도와 조술도가 후진 양성을 위해 마을 원로들과 의논해 지은 서당이다. 주곡리 한양조씨 외에도 도곡리의 함양오씨, 가곡리의 야성정씨가 건립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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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술도의 정자인 ‘만곡정사’는 원래 원당리 선유굴 위에 지어졌다가 주곡으로 한 차례 이건한 뒤 현재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폐쇄형 마루 등이 일반 한옥 양식과는 구별되지만 구조와 치목수법 등에서 조선 후기의 양식이 드러난다.

 

마을 앞에는 붓끝처럼 뾰족한 문필봉이 솟았고 마을 뒤에는 물위에 뜬 연꽃 같은 부용봉(芙蓉峯)이 펼쳐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로 장군천이 흘러 넉넉한 땅을 이루니 주곡(注谷) 또는 주실(注室)이라 한다. 주곡은 물이 쏟아지는 골짜기, 곧 글 읽는 소리 끊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주곡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향이자 한양조씨(漢陽趙氏) 세거지인 주실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1. 주실의 한양조씨

주실에 한양조씨가 터를 잡은 것은 인조 8년인 1630년경으로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영양읍 원당리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매한(梅寒)이라 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약산당(約山堂) 조광의(趙光義)로 1577년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 창립 원로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조전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식들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쓰고 독려하였고, 아들과 증손자 등이 연이어 급제하면서 주실에 한양조씨의 학문적 기틀을 다지게 된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은 호은 조전의 묘갈명에 ‘아들의 좋은 선생을 찾아 공부하게 한 것은 영양의 문풍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특히 조전의 증손자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은 문장과 경학(經學)이 뛰어나 숙종 때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다. 영조 1년인 1725년에는 사간원 사간으로 임명되었으며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조의 상소를 올렸다가 종성에 유배되었다. 3년의 유배를 마친 후 다시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728년 무신의 난 때 임금의 명으로 의병을 결집해 활약했다. 다시 동부승지에 임명된 그는 경연에 참여하는 등 잠시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얼마 뒤 사직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영조 12년인 1736년에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던 서원에 대해 반대하는 소를 올려 노론의 탄핵을 받게 된다. 그로 인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 그는 제주에 도착하기 전 강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덕린의 죽음은 이후 그의 후손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 조희당(趙喜堂)은 출사하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손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덕린의 학문은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마암(磨巖) 조진도(趙進道),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형제가 계승했다. 조운도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말을 익힐 나이에 글자를 변별했다고 한다. 조진도는 영조 35년인 1759년 과거에 급제했지만 조덕린의 손자라는 이유로 급제를 취소당하자 이후 산촌에 은거하여 영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술도는 9세 때 조부의 죽음을 목도한 뒤 이후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형제들은 모두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가학(家學)을 확립하였고 선비의 사표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조선후기 실학자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과 교류하면서 보다 먼저 제례의 간소화, 관례와 혼례의 통합 등 생활의 개혁을 통한 근대화에 앞장섬으로써 마침내 주실은 한양조문(趙門)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들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정신이 깃든 곳이 바로 주실마을의 월록서당(月麓書堂), 만곡정사(晩谷精舍), 학파헌(鶴坡軒)등이다.

#2. 월록서당

월록서당은 주실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원로들과 의논하여 조운도와 조술도가 주관하고 주곡리의 한양조씨, 도곡리의 함양오씨(咸陽吳氏), 가곡리의 야성정씨(野性鄭氏)가 함께 참여해 영조 49년인 1773년에 건립했다.

월록서당은 일월산 자락의 서당이라는 뜻으로 영산서당이 서원으로 승격된 이후 영양에서 처음 세워진 서당이었다. 조지훈도 어린 시절 월록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월록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 좌우측은 온돌방이다. 전면과 측면에 쪽마루를 두었는데 측면에는 낮은 평난간을 두르고 전면에는 가운데 출입구를 제외하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월록서당
1773년 조운도·조술도 주관으로 건립
한양조씨 학문의 터전…조지훈도 수학
정면 4칸·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만곡정사
옥천 조덕린의 손자 만곡 조술도 정자
1797년 마을 방문한 채제공이 현판 써
가운데 대청방 중심으로 좌우 온돌방

◆학파헌
월하 조운도 손자 조성복이 공부한 곳
현판은 정약용 글씨…진품 후손이 보관
오른쪽 ‘함진재’·왼쪽 ‘직방재’ 편액



대청방의 정면에는 네 짝 여닫이 들어걸개문을 달았고 배면에는 판문을 달고 판벽으로 마감했다. 좌우측 온돌방은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마루간 쪽으로 외여닫이 세살청판분합문과 두 짝 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쪽마루 쪽에는 두 짝 여닫이 세살문을 달았으며, 각 측면에는 외여닫이 세살문과 만살창을 달았다.

처마도리에는 ‘월록서당’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방에는 ‘존성재(存省齋)’와 ‘극복재(克復齋)’ 편액이 걸려 있다. 월록서당 현판 글씨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기문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다. 내부에는 몽서(夢瑞) 이헌경(李獻慶),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등의 시판과 조운도, 진도, 술도 형제가 쓴 서당원운(書堂原韻)이 걸려 있다. 월록서당은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한양조씨의 가학을 이어주는 학문의 터전이 되었다.

#3. 만곡정사

주실의 서쪽 천변에는 조술도의 정자인 만곡정사(晩谷精舍)가 위치한다. 원래 정자는 그의 제자들이 1790년 영양읍 원당리 선유굴(仙遊窟) 위에 세워 강정(江亭)이라 불렀다. 그러다 그의 만년에 스승의 쓸쓸함과 불편함을 걱정한 제자들이 주곡으로 옮겨 미운정(媚雲亭)이라 했다. ‘미운’이라는 말은 주희(朱熹)의 ‘운곡(雲谷)’이라는 시에 ‘다행히 장마가 잦아들면 조용히 홀로인 것도 괜찮네(幸乏霖雨姿, 何妨媚幽獨)’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때가 순조 2년인 1802년, 조술도는 그 이듬해 제자들의 지극한 존경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정자는 후인들의 공부방으로 쓰이다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만곡정사가 되었다.

만곡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팔작집이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방과 오른쪽 온돌방 앞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를 열었다. 좌측의 온돌방은 툇마루 열까지 당겨 방을 만들고 배면에 반 칸의 고방을 두었는데, 전면의 기둥 밖으로 마루를 연장시켜 좌측 온돌방 앞으로는 쪽마루가 놓인 형태다. 즉 쪽마루와 툇마루가 이어지며 전체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대청방 정면에는 두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아 폐쇄하였다. 건물의 뒤쪽에는 담을 두르지 않고 자연석으로 쌓은 석축을 그대로 두었으며, 앞쪽에는 담을 쌓지 않고 개방한 채 좌우 양 측면에만 기와를 얹은 토석담을 쌓았다.

만곡정사의 현판은 정조 21년인 1797년에 채제공이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주실마을을 방문했을 때 써주었던 것이라 한다. 만곡. ‘뒤늦게 경문하고 옹졸하게 도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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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실마을의 한가운데에는 조운도의 손자인 조성복의 정자 ‘학파헌’이 자리잡고 있다. 평면은 만곡정사와 거의 같다.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인데 진품은 후손이 따로 보관하고 있다.
 

#4. 학파헌 

 

마을의 한가운데에 조운도의 손자인 조성복(趙星復)의 정자 학파헌(鶴坡軒)이 자리한다. 조성복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가학을 이어나간 인물로 학덕을 고루 갖춘 선비였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조술도에게 사사하였고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야순(李野淳), 강운(姜橒), 이의발(李義發), 이병운(李秉運), 홍시제(洪時濟), 이인행(李仁行) 등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학파헌은 조성복이 공부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홑처마 맞배지붕의 작은 정자다. 평면은 만곡정사와 거의 같으며 마루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오른쪽 마루 위에는 함진재(涵進齋), 왼쪽 마루 위에는 직방재(直方齋) 편액이 걸려 있다. 학파헌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인데 진품은 후손이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평생 은거한 조성복에 대해 정약용은 그가 시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며 한탄했다고 전한다.

조덕린은 조술도의 노력으로 정조 13년인 1789년 복권되었다. 조덕린의 영향으로 가문에 홍패(대과급제증서)가 넉 장, 백패(소과급제증서)는 아홉 장에 불과했으나 63인의 후손들이 문집과 유고를 남겼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며 고고한 선비의 삶을 살았던 주실의 한양조씨들은 마을을 문한(文翰)의 땅으로 성장시켰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중략)/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지훈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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