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13> 일월면 곡강리 망운정과 가천리 가천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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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12   |  발행일 2019-12-12 제13면   |  수정 2021-06-21 18:04
백행의 근원 孝로써 仁을 실천한 일월산 자락 두 선비의 표상
[영양의 魂 樓亭 .13] 일월면 곡강리 망운정과 가천리 가천정
영양 가천정 사주문 옆 담장 안에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쳐 있는 노송이 눈길을 끈다. 가천정이란 명칭은 김찬구의 5세손인 김낙현과 김준현이 세월이 흘러 퇴락한 삼친당을 중건하면서 새로 붙였다.

 

 

유교의 근본 사상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덕성, 즉 ‘인(仁)’이다. 이에 대해 유교의 근본 문헌인 논어에서 공자는 ‘먼저 부모와 형을 섬긴 뒤에라야 인의 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효(孝)’는 ‘인’의 바탕이 된다. 퇴계는 ‘효가 백행의 근원이고 천지의 모든 인간생활의 지도 원리이며 근본’이라고 할 정도로 효를 가장 높은 차원의 덕목으로 보았다. 영양 일월산 아래 효로써 인을 실천했던 두 인물의 정자가 있다. 망운정과 가천정이다.



[영양의 魂 樓亭 .13] 일월면 곡강리 망운정과 가천리 가천정
일월면 곡강리에 위치한 망운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의 누정건물로 조선후기 독특한 서당 양식을 보여준다. 망운이란 ‘자식이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영양의 魂 樓亭 .13] 일월면 곡강리 망운정과 가천리 가천정
망운정 현판
 

#1. 곡강리 망운정 

 

일월산에서 흘러내려온 반변천이 흥림산(興霖山) 줄기의 바위벽에 부딪힌다. 남으로 향하던 물길은 그예 몸을 뒤틀어 동북쪽으로 향하니 그 천변의 마을을 굽은갱이 또는 곡강(曲江)이라 했다. 숙종 때인 1692년에 현감(縣監) 정석교(鄭錫僑)가 곡강에서 시회를 열었는데 그 첩첩 곧게 솟은 바위벽을 보고는 ‘비단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하다’하여 척금대(滌襟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척금대를 바라보는 물길 건너편 고즈넉이 작은 갯마을의 높은 지대에 망운정(望雲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영양 삼지리에 살았던 망운(望雲) 조홍복(趙弘復)이 1826년 선조의 묘소 옆에 터를 잡아 만년을 보낸 곳으로, 망운이란 ‘자식이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조홍복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중(穉重)으로 1773년에 태어났다. 사월(沙月) 조임(趙任)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쌍괴당(雙槐堂) 조호신(趙虎臣),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의 증손인 이규원(李規遠)의 딸이다.


◆망운정
‘망운’은 자식이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
조홍복이 1826년 선조 묘 옆에 터 잡아
가운데 두칸 대청방…좌우측은 온돌방


조홍복은 효성이 지극했으며 동생 조남복(趙南復)과의 우애가 남달랐다 한다. 20세 때 문장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도산시회에서 연 3일 장원을 차지해 여러 선비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향시에서도 장원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문장을 아끼고 중히 여긴 군수가 성시(省試)에 같이 응시하여 글을 대신 지을 것을 강요하자 그는 거절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군수의 모략으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순조 5년인 1805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1807년에는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오직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출사를 단념하고 향리에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구휼하고 후진을 기르는데 힘썼다. 그리고 만년에 선영 근처에 망운정을 짓고 선조들의 무덤을 지키며 책으로 양식을 대신했다고 한다.

망운정은 약간 기울어진 대지 위에 높직이 자리한다.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터를 다듬었고 사방으로 와편 토석담장을 두르고 가운데에 일각문을 세웠다. 정자의 기단은 잔디를 깐 마당 안쪽에 자연석을 2단으로 쌓아 시멘트모르타르로 마감했다.

망운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의 누정건물로 기단 위에 자연석주초를 놓고 누하주를 세워 상부의 사각기둥을 받도록 했다. 전면과 좌측면에는 쪽마루를 내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우측면에는 자연석 계단을 두었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으로 전면에는 각각 판벽을 세우고 두 짝 여닫이 띠살청판문을 달았다. 좌우측은 온돌방으로 정면에 두짝 여닫이 띠살문, 측면에는 외여닫이 띠살문과 걸창을 내었다. 망운정에는 원래 관리재사가 있었지만 1960년경 소실되었다.

조홍복의 조카 조언관(趙彦觀)이 지은 ‘망운정기(望雲亭記)’에 따르면 1841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 상사(上舍) 김양범(金養範)이 주창하고 후배 17인이 추종하여 족제(族弟)인 조언익(趙彦益)과 조언홍(趙彦弘)이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조홍복이 머물던 정자를 이때 고쳐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정자에는 조홍복의 망운정 시판이 걸려 있다.

‘예로부터 은자들 뭍 골짜기에서/ 새로 작은 정자 차지하니 넓은 동천이라/ 산은 큰 들을 에워싸서 둥근 형국 이뤘고/ 층층바위 부딪치는 물결 굽은 고리 같네/ 반평생 세월 헛되이 보내며 늙어가나/ 한 구역 구름에 비로소 한가로움 틈타네/ 노닐며 보는 즐거움뿐 아니라 학문을 닦고/ 책상머리 앉아 남은 생을 계획하네.’

조홍복은 비록 나물죽이나 미역국조차 배불리 먹지 못할 정도로 곤궁하였지만 책으로 양식을 대신할 만큼 자기성찰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고 전한다. ‘시골 산속 집은 늘 찾는 이가 없어서 단지 구름과 달을 벗했다’는 그는 자신의 뜻에 따라 한결같은 삶을 살았다는 고결한 인품의 선비였다.



[영양의 魂 樓亭 .13] 일월면 곡강리 망운정과 가천리 가천정
가천정 현판
 

#2. 가천리 가천정 

 

곡강의 상류에 반변천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하나가 있다. 천이 아름다워 가천(佳川)이라 했다. 그 갯가의 마을은 가천, 가실(佳室), 가곡, 개곡이라 한다.

영양읍 동부리 태생인 선비 김찬구(金贊龜)는 정조 7년인 1783년에 이곳 가천리로 이거했는데 심산유곡(深山幽谷)에 가천동천(佳川洞天)이라 자신의 호를 가천이라 하였다.

김찬구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언(熙彦)이며 현감 김지철(金之哲)의 19세손으로 1732년에 태어나 효행으로 향리의 포상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정조 18년인 1794년에 정자를 짓고 자손들을 가르쳤는데 정자의 이름은 삼친당(三親堂)이라 했다. ‘삼친’이란 가장 가까운 세 친족으로 부자, 부부, 형제를 말하고, 삼친당은 인륜(人倫)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인자(仁慈), 효도(孝道), 공경(恭敬)을 근본으로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가천정
1794년 김찬구가 건립 자손들 가르쳐
첫 명칭은 삼친당…1907년 후손 중건
1987년 경북도문화재자료 196호 지정


1806년에 김찬구가 세상을 떠난 뒤 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정자는 퇴락하였는데 1907년에 5세손인 김낙현(金洛顯)과 김준현(金峻顯)이 중건해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가천정(佳川亭)이라 했다.

가천정은 낮은 경사지에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아 터를 만들었고 사면에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 담장을 두르고 정면 우측에 사주문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방을 두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구성했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기둥 밖으로 확장해 깔고 계자난간을 세웠으며 양 측면에는 쪽마루를 놓았다. 대청방의 정면에는 네 짝 여닫이 세살분합문을 달았고, 배면에는 머름을 꾸미고 판벽에 두 짝 여닫이우리판문을 달았다.

좌우 온돌방의 정면에는 머름을 꾸미고 두 짝 세살문을 달았고 측벽에는 외여닫이세살문을 달아 쪽마루를 통해 외부와 연결했으며 배면에는 두 짝 여닫이만자살창을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을 2단으로 쌓고 시멘트모르타르로 마감했다.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툇마루의 정면에는 둥근 기둥,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툇마루의 정면 처마도리에 ‘가천정’ 편액이 걸려 있고, 대청방에는 삼친당 편액이, 우측의 외벽에는 ‘모한재(暮閒齋)’ 편액이 걸려 있다. 원기둥과 전면의 사각기둥에는 모두 주련이 달려 있다.

사주문 옆 담장 안에는 한 그루 노송이 힘차고 의지적으로 솟구쳐 있다. 소나무 옆에는 150년 된 향나무가 있었는데 2009년에 도둑을 맞았고 현재는 새로운 나무를 식재해 놓았다. 좌측 담장 밖에도 두 그루의 늙은 향나무가 자라 있는데 마치 가천정의 안마당에 뿌리를 내린 듯한 모습이다.

가천정은 1907년 중건한 이후로도 꾸준히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를 중건했던 김낙현은 1903년에 일어난 대기근 때 양곡 수백 섬을 풀어 주민들을 구제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인(仁)은 곧 효(孝)다. 가천정은 1987년 12월29일 경북도문화재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영양군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지명유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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