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내가 좋아하는 것들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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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23 07:49  |  수정 2020-01-23 07:52  |  발행일 2020-01-23 제23면

이호원
이호원<다님그룹 대표>

재즈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my favorite things'를 좋아한다.

처음 들은 것은 John Coltrane의 것이지만, 꼭 그의 것이 아니더라도 같은 선율이 들리면 여전히 마음을 뺏긴다. 한번은 똑 부러진 여자 목소리로 'Rain drops on roses'하며 시작하는 노랫말을 들었다. '장미에 맺힌 빗방울 그리고 작은 고양이 얼굴에 난 수염들, 밝은 구릿빛 주전자와 털실로 짠 따뜻한 장갑, 그리고 끈으로 예쁘게 묶은 갈색 종이 상자들.' 알고 보니 그것이 'my favorite things'의 원곡이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회생활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본가를 나오고 나서는 늘 번화가 한가운데에 살았다. 서울 홍대, 방콕 카오산로드, 서울 공덕오거리. 집 앞을 몇 걸음만 나와도 최신 유행으로 시끌벅적한 세상 속에서 살았다.

모르는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아버릴 듯이 정신없이 사람들을 만나가며 일했다. 나는 나를 잊고, 세상 일에 취해 살았다. 그랬던 내 마음이 서른 중반이 되자 한풀 꺾였다.

불편한 관계, 불편한 일, 마음이 가지 않는 것들을 정리해 나갔다. 돈이 되는 일일지라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사양했다. 돈 되는 일을 주겠다는데 왜 안 하냐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성화였다. 분명하게 싫은 이유를 댈 수는 없었지만, 분명하게 좋은 이유도 없었다.

요즘 아침은 눈뜨고, 양치하고 물 끓이면서 시작된다. 찻물이 끓으면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뽀얗게 올라온다. 차판 위에 잔을 놓고 끓는 물을 붓고, 닦아내고 가지런하게 정리를 하다 보면 '차 한 잔 줘' '차 한 잔 주세요' 하며 아내와 아이들이 차탁으로 모인다. '어떤 차로 드릴까요?'하면 '좋은 거 좀 내봐' 하며 아내는 농을 건다.

사실 오늘의 차는 이미 정해져 있다.

수증기가 떠오르면서 내 머릿속에도 사진처럼 떠오르는 차, 그 차가 바로 오늘의 차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우리는 함께 똑똑 떨어지는 찻물을 쳐다보고, 찻잔에 담긴 뜨거운 찻물 위로 운무가 일어나는 광경을 목도한다.

내가 첫 잔을 내리고 나면 다음은 큰 아이, 그다음은 작은 아이 차례다. 아이가 내려준 찻잔에 코를 대어본다. 지난달 대만에서 가져온 '문산포종'의 향이 찻잔을 흘러넘친다. 그때 가져온 고궁박물원 도록을 흘겨본다. 사람이나 보물이나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것들이 남는다. 확실히 좋은 것들만.
이호원<다님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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